그림과 나

by 황성동

그림과 나

1960년대 말, 나는 서울 미아리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운 1학년 때였다. 처음 마주한 전깃불, 육교, 수돗물, 극장…. 그 모든 것이 문화 충격이었다. 한 시간이 넘는 통학길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작은 이모가 손을 잡고 데려다주곤 했다. 세월이 흐른 뒤, 이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한다. “서울 아이들 틈에서 네가 내 모습이 안 보이면 금세 울먹이곤 했지. 그런데 말이야, ‘그림 그리는 시간’만 되면 눈빛이 달라졌어. 말없이 집중해서 그리더니, 선생님이 참 많이 칭찬하시더라.” 그림은 그렇게, 겁 많던 어린 내가 세상과 처음 연결되던 조용한 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은, 평생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던 가난한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자유교양미술대회’에서 1등 한 것을 계기로, 당시 살던 용두동 시장통의 낡고 삐걱거리던 2층짜리 건물 구석에 있던 화실에 두 달쯤 보내주셨다. 그곳에서 처음 수채화를 배웠다. 그 덕분이었을까. 중학교 3년 동안, 봄과 가을마다 열리던 사생대회에서는 늘 내가 1등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학과 공부는 뒷전이었고, 미술반 활동에 푹 빠져 지냈다. 삼수 끝에 들어간 대학은 2년을 다니다 자퇴했다. 이후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했고, 근무 중 집 근처의 대학교, 사대 미술교육과에 다시 입학했다. 해제 후 복학해 적지 않은 나이의 예비역으로 4년을 나름 성실히 다녔다. 덕분에 졸업 시 사대수석을 했다. 대학원에도 진학해 조교로 일했고, 한동안은 미술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 무렵, 사립 사범대 출신도 공립학교 교사 임용이 가능하다는 헌법소원이 받아들여졌고, 임용고시가 부활했다. 그 첫해 시험을 치러, 나는 미술교사가 되었다. 그렇게 31년을 교직에서 보냈고, 2022년 명예퇴직한 지도 어느덧 4년이 흘렀다.


젊은 날의 길동무들, 스치듯 지나간 인연들이 국내외로 뻗어 나가 빛나는 성취를 이루고 있다. 그들의 얼굴엔 영광의 미소가 어른거린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초등학교 교실 구석에서 세상이 두려워 그림에 몰두하던 그 소심한 아이처럼, 조용히 캔버스 앞에 앉아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철없던 판단과 미숙한 선택으로 입시를 반복하던 시절에도 나는 오직 그림 하나에만 의지했다. 젊은 날, 이유 없는 방황과 어리석은 관계 속에서 길을 잃곤 했지만, 단 한 번도 붓을 놓은 적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습기 어린 반지하 작업실에서, 나는 여전히 웃고 울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철이 들지 않은 내 영혼은, 그렇게 나의 세계 속에 머물러 있다.

1980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 살 때, ‘그림과 나’라는 제목을 붙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노트는 어느덧 서른아홉 권이 되었다. 대부분 대학노트 크기였고, 한 권에 200에서 300쪽에 이르는 분량이었다. 글이 주를 이뤘지만, 틈틈이 그린 스케치도 적지 않았다. 그중 일부는 오래전 따로 뜯어내어 보관했고, 1980년부터 1987년 사이에 끄적인 스케치들은 복학 후, 대학 2학년 여름방학 과제로 제출하기도 했다. 그 노트들은 내 삶의 일부였고, 말하자면 나 자신이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은밀하고도 소중한 기록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결심했다. 황혼에 접어든 인생의 길목에서, 내 아이들에게 짐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떠나보내기로. 그 노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은 뜻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한 장 한 장 파쇄하며 다시 읽게 된 낡은 문장들은 종종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고, 잊었다고 여겼던 젊은 날의 숨결이 다시 가슴을 두드렸다. 그림에 대한 나의 짝사랑이 숨김없이 민낯으로 드러났다. 그 시간들은 어리석고 서툴렀지만 진심이었고, 부끄럽고 아팠다. 나는 꾸역꾸역, 몇 해에 걸쳐 모든 노트를 버렸다. 정말로 꼭 필요한 몇 장만, 온라인 문서로 남겨두었다.


그림은 내게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존재다. 지금도 고독 속에 몸을 떨게 하고, 애증에 젖어 불면의 밤을 지새우게 하는 평생의 짝사랑이다. 이렇게 글로 토해내는 마음조차, 어쩌면 또 한 번의 배수진, 나약한 마음이 쳐놓은 방어막일지도 모른다. 나를 잠식한 수많은 실패와 부족함, 그 깊은 자리에 웅크린 트라우마가 불쑥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를 웃게 하면서도, 차디찬 냉기와 뜨거운 열기를 번갈아 쏟아내며 심신을 뒤흔드는, 끝없이 변덕스러운 연인이기도 하다. 언제나 마음을 다 주어도 다 닿지 않는 존재.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202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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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부터 써온 '그림과 나' 일기장



20260111_131314.jpg 1980년대 스케치 연습장


20260111_131433.jpg 1980년대 스케치 노트


20260111_131610.jpg 1980년대 스케치를 바탕으로 작업한 2000년대 작품' 생각하는 사람' 연작 중 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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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스케치를 바탕으로 작업했던 2000~2006년경 작품들 중 소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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