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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 Aug 02. 2022

공산당 선언 분석3(完): 3절, 서설, 평론

3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문헌



3절은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주창하기 이전에 제시되었던 여러 사회주의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파트이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애덤 스미스와 헤겔이 마르크스에게 미친 영향을 정리해볼 생각이다.



먼저 애덤 스미스에 대해서 말해보자. 엄밀히 말하면 사회주의에 대해서 애덤 스미스가 차지하는 자리는 사실상 전무하다. 애덤 스미스는 사회주의에 대한 욕구가 사회에 싹트기 이전에 이미 죽어버린 인물이며 그에 대해 논할 인물도 아니다.



하지만 3절에 여러 사회주의 중에서 자본주의 체제는 인정하지만 이 체제를 역사의 끝으로 여기고 더 이상 진보하려고 하지 않고 역사적 역할을 다하려고 하지 않는 부르주아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는데, 이것은  애덤 스미스가 살아 생전에 집필한 사상을 아직까지 곧이곧대로 따르려고 하는 작자들을 겨냥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내 사견으로 추측해본다.



부르주아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당면한 문제들은 분명히 인식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본주의를 넘어선 진보를 택하긴 커녕 그저 자본주의에 안락하게 안주하면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안일한 태도에 찌들어진 분파들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애덤 스미스는 사회주의와는 연관이 없는 사람이다. 엄밀히 말해서 부르주아 사회주의에서 애덤 스미스를 연상했다고 해서 내가 그를 소급해서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마르크스가 이들 분파를 비판하는 것은 아무래도 애덤 스미스의 성취에서 한발자국도 지적 진보를 이루지 못한 그들의 지적 게으름과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애써 무시하려고 하는 그들의 안일함을 지적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감히 추측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가 애덤 스미스를 추종하여 그의 고전경제학을 계승한 업적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고전경제학의 완성으로 평가받을만 하다. 동시에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론은 애덤 스미스의 역사발전론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이 글에서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적 영향을 짚고 넘어가기엔 공산당 선언 본문의 주제를 너무 벗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애덤 스미스의 철학이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어 사적 유물론과 역사발전론을 환기시킨 것이 공산당 선언을 분석하기에 용이할 것 같다.



애덤 스미스의 고전 경제학과 그의 사상은 사회의 진보에 대해서 다룬다. 진보는 변화와는 다르게 과거에 비해 좀 더 나아지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저서로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이 유명하지만 사실 그의 사상을 완전히 대변한 저서는 '법학강의'다. 그에게 진보란 사유재산이 과거 시대보다 더욱 존중받는 것이다. 법적으로 사유재산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만큼 개인에 대한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역사발전을 4시기로 나누었는데 첫째 수렵 시대 둘째 목축 시대 셋째 농경 시대, 넷째 상업 시대이다.



가장 저열하고 야만적인 시대엔 사유재산은 커녕 자기 자신의 안전과 번식조차 장담하기 힘들지만 농경 시대엔 봉건 영주들이 개인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상업 시대엔 비로소 왕이나 귀족조차도 시민의 재산을 마음대로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시대가 발전하면서 좀 더 복잡한 법체계로 개인의 사유재산은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을 시대발전의 씨앗이라고 말한 것과 다르게 생계양식이 발전하면서 시대가 발전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개인의 행동 동기를 자기이익에 따라 행동한다고 규정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애덤 스미스가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나 '탐욕적인 존재'로 규정했다는 것인데, 사실은 이와 다르다. 그는 중세시대 성직자들이 농노를 해방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려는 시도에서 성직자의 자기이익을 포착하였다. 성직자는 농노해방을 위하여 지주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국왕과 기꺼이 협력하였는데 이처럼 성직자들이 농노들을 해방한 이유는 교회에 이익이 된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사회는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사회구성원들의 행동들이 생게양식이 발전함에 따라 진보하는 양상을 띄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가 말한 상업 시대를 직접 목격하였다. 그리고 상업 시대를 사회가 발전하는 마지막 시대로 평가하였다. 그가 보기에 상업 시대는 사유재산이 법적으로 충분히 보장받았고 시장에서 개인들의 자유롭게 참여하면서 물적 진보를 이룬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에 자본주의라고 불릴 이 시대가 비록 빈부격차를 만들어내지만 기존의 봉건시대에선 볼 수 없었던 놀라운 경제적 풍요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목했다. 경제와 사회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법과 국가제도가 발전하는 것은 사적 유물론의 프로토타입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과연 역사는 이 시대가 완전한 종착지일까?



애덤 스미스의 역사발전론은 독일의 헤겔에 의해서 관념적으로 계승되었다. 헤겔은 프랑스 혁명을 목격하였고 프랑스에서 유구한 신분제도의 역사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타파되는 것을 보고 새로운 진보의 시대가 다가온다고 느겼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일대의 사건은 절대정신이라는 진보의 움직임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헤겔은 절대정신으로 애덤 스미스가 완결지은 역사발전론에 연장선을 그었다.



헤겔은 절대정신이 국가나 관료집단이 사회를 통제함으로써 질서정연한 진보로 나타나는 것을 구상하였다. 시민사회는 보기 보다 예측불가능하고 때로는 광기로 치닫을 수 있는 기이한 존재였다. 프로이센의 관료주의는 어디로튈지 모르는 시민사회를 지정된 길로 인도하고 차근차근 안정되게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게 만드는 안내자의 역할을 맡을 것이다.



공산당 선언에서 언급된 독일식 사회주의는 바로 헤겔의 입장을 반영한다. 부르주아의 진취와 혁신은 국가에 의해 통제받고 부르주아는 국가에 협력해야 한다. 국가가 직접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참인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은 불필요한 것임이 틀림없다.



마르크스는 해겔에게서 다음 시대를 파악하였다. 그러나 그는 헤겔이 추상적인 절대정신의 흐름을 강조한 것과 다르게 프랑스 혁명에서 계급 간의 실천적인 계급갈등을 보았다. 또 생산수단의 발전은 사회주의 이전에 반드시 선행해야하는 것이며 이 과업은 국가가 아니라 오직 부르주아들만의 과업이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업들이 서로 맞물릴 때 비로소 사회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 즉 현실의 변증법이 구체화될 때 비로소 공산주의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선대 철학자들의 업적을 비판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완성시켰다. 마르크스가 열거한 사회주의들은 곧 마르크스주의의 모태들이다. 그는 이것들을 비판하면서 본의 아니게 자신의 이론들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서설 및 평론



필자가 읽은 책은 펭귄북스 역본으로 게레스 스테드먼 존스라는 역사학자가 서설을 담았다.  이 분석의 첫 글머리에서 언급했다시피 나는 서설을 일체 읽지않고 공산당 선언 본래의 텍스트를 직접 해석하였다.



내가 서설을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이 서설의 내용이 지금까지 써왔던 이 글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나와 서설의 필자는 공통으로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소련에서 일반화된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를 다시 마르크스 정상과학의 범위로 되돌려 놓아야한다고 말한다. 레닌주의가 국가자본주의를 미화하는 인민의 아편임을 서로가 동의하고 있다.



즉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왔다면 느꼈겠지만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 선언은 물론이거니와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수많은 오해를 갖고 접해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계획경제? 전체주의? 경제발전 없는 게급투쟁? 마르크스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마르크스는 어디까지나 시장주의자였으며 자본주의의 애찬가였다. 내가 2편에서 예를 들었듯이 생산수단이 완전히 발전하기 전까진 계급투쟁은 시기상조이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선동에 휩쓸려 너무나도 성급하게 행동한다.



서설에서 언급하듯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릇된 오해들은 소련 성립이라는 정치적이고 분파적인 역사적 조건에서 비롯되었다. 마르크스주의가 소련과 레닌주의를 넘어서야할 이유는 수백 개가 있다. 반면에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풍토는 역사적으로 레닌주의에서 비롯된 운동권과 매카시즘의 기이한 변증법으로 인해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로 얼룩져있다.



소련이라는 국가에 대해선 참 할 말이 많다. 소련이 노동자들을 극도로 착취하면서 성장한 나라라면 믿겠는가? 소련은 성립 시작부터 공산주의를 참칭하여 국가가 노동자를 악랄하게 착취한 국가자본주의체제다. 한마디로 국가가 자본가의 역할을 대신 한 셈이다. 그 착취 강도는 자본가들의 것과 비견될 정도로 혹독하였고 어느 부분에선 자본가들도 허를 내두를 정도로 비인간적인 착취 방법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그 방법들은 대체로 비효율적이었고 노동자들의 근무의욕과 생산성을 대폭 감소시켰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를 배반당한 혁명으로 규정하였으나, 애초에 소련은 성립부터 노동자를 위한 국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배반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국가의 형편없는 계획경제는 기술과 생산성 혁신 부분에서도 바닥을 기었다. 소련의 국내총생산은 중공업에 집중되었는데 시민들의 실제 소비와는 완전히 괴리되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세계시장에서 소련의 상품들은 냉정하게 평가받았다. 그 결과는 한심할 정도로 저급한 품질로 취급되었고 상품 경쟁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련 붕괴 이전에 거대했던 국내총생산은 허울이었다. 국가는 어떠한 혁신도 이루지 못했다.  대체 소련이 지난 80년 동안 이룩한 업적이란 게 무엇이란 말인가



현실적인 조건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마르크스 원전을 독학하고 계급의식과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만 키우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잘못 배우고 있다.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는 점차 불안정해지고 자기존립마저 위태로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고용불안정문제, 노동임금문제, 부채문제, 부동산 거품문제, 국민들과 시장이 점점 정부와 포퓰리즘에 의존하는 등등 자본주의가 위기의 조짐을 보였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지금 이러한 문제들은 분명 우리가 지금 당장 직면한 문제들이다. 정말로 자본주의의 최종국면에 들어섰을까? 그것은 아직 알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징후는 보인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사망한 뒤 마르크스주의가 교조화된 이후 많은 마크르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일반위기론을 설파하면서 종말론의 예언자를 자처하면서 기약없는 묵시론을 주절거렸다. 나는 아무 근거도 없이 당장 위기가 찾아오면 종말론을 꺼내드는 이 속물적이고 게으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경멸한다. 이들의 주장은 본디 자본주의의 한계점을 정확히 계산해서 내뱉는 말이 아니라 뼛속깊이 뿌리박힌 자본주의에 대한 원초적인 혐오감이 만들어낸 저주들이다. 이건 확실하게 해야한다.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라도 자본주의의 위기를 직감하고 이것을 정확한 타이밍에 예측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악의적인 감정에 지배당해 허구한 날 저주만 해대는 것은 감성이다. 감성은 세계를 구원해내지 못한다. 만일 얼마 남지 않은 시일에 자본주의가 정말로 위기를 맞이할 경우 우리들은 이 두 견해를 잘 구분해야만  한다. 왜냐면 한쪽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만 한쪽은 악의적인 선동선전 외엔 사회를 이끌어가거나 공헌할 능력이나 대안도 없는 무뢰배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소련이라는 준비되지 않은 국가를 이뤄낸 것이다. 공산당 선언은 바로 그러한 속물을 경고한다.







ps. 공산당 선언 분석 시리즈를 엇비슷한 시점에서 다 써놨는데 브런치에는 깜박하고 안 올렸네요. 늦게나마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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