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시도한 흔적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왜 나만 이 모양일까.”
같은 교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 것 같았는데 어느새 인생은 전혀 다른 궤도를 그리고 있다. 누군가는 번듯한 자리를 잡았고, 누군가는 이름 석 자만으로 브랜드가 됐으며, 누군가는 '안정'이라는 훈장을 달았다. 그 사이에서 나는 늘 제자리였다. 아니, 제자리가 아니라 속절없이 뒤처지고 있다는 공포가 더 컸다.
학창 시절의 나는 늘 애매한 위치에 머물렀다. 잘하는 것도, 눈에 띄는 재능도 없었다. 말은 어눌했고 글 위에는 늘 교정의 빨간 줄이 가득했다. 발표 시간은 공포였고, 국어 시간은 배움의 시간이 아니라 견뎌야 하는 생존의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교탁 앞에서 번호를 고를 때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친구의 번호가 불리면 안도했고, 마침내 내 번호가 호명되는 날엔 쥐구멍을 찾았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꼴깍’ 침을 삼키며 개미만 한 목소리로 첫 단어를 뱉어내던 소녀. 그때 이미 나는 나 자신에게 성급한 결론을 내려버렸다.
“나는 이런 쪽은 아닌가 보다.”
모순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겨우 낭독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을 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목소리가 너무 좋구나. 글을 꼭 아나운서처럼 읽네.”
칭찬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국어 시간은 더 지독한 지옥이 되었다. 선생님은 일부러 내게 낭독을 시키셨고,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선생님의 입술이 “오늘은 몇 번…” 하고 달싹이는 순간 나는 숨이 막혔다. '제발 내 번호만은…' 간절한 기도는 나를 목각인형처럼 굳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책을 읽을 때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혹은 다시 실패할까 봐.
언젠가부터 선생님도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으셨다.
가끔 그때를 생각한다. 무엇이 그토록 두려워 나를 그 작은 교실 뒤편으로 숨게 만들었을까.
그 무책임한 결론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왔다. 20대, 30대, 그리고 40대 초반까지도.
"무언가 시작하려 할 때마다 과거의 흑역사가 발목을 잡았다. 실패했던 장면, 무시당하던 타인의 표정, 스스로 움츠러들던 비굴한 순간들.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아예 움직이지 않는 쪽을 택했다. 하지 않으면, 적어도 실패할 일은 없으니까. 그렇게 그냥, 생각 없이 살았다. 무언가를 도모할 의지도, 나아질 거라는 기대도 내려놓은 채 흘러가는 대로 나를 방치했다. 생각하지 않아야 괴롭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그 회피가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안정 대신 공허가 찾아왔고, 실패 대신 후회가 쌓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타인과의 비교는 더 잔인해졌다.
“나만 뒤처진 것 같아”라는 혼잣말은 스스로를 조롱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억지로 웃으며 넘기려 해도 속은 이미 허물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낯선 질문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정말 나만 뒤처진 걸까? 아니면, 다들 잘 가고 있는 척 연기하는 걸까.’
그 작은 의문이 견고하던 절망에 균열을 냈다. 흑역사는 나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다만 나는 그것을 숨기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상기시키며 괴롭혔을 뿐이었다.
중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 있다.
흑역사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치열하게 시도했던 흔적이라는 것을.
과거의 나는 미숙했고 서툴렀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나까지 무력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이 깨달음이 인생을 단번에 뒤집지는 않았다.
다만 아주 작은 행동 하나를 가능하게 했다.
“한 번만 더 해보자.”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흑역사를 지우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그 민망한 기록들 위에 하루 한 줄의 새로운 일상을 쌓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반복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생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중년의 흑역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선이다. 남들보다 늦었다는 사실이 영원히 늦을 운명을 뜻하지는 않는다. 행동은 나이를 묻지 않고, 반복은 과거를 비웃지 않는다. 그저 오늘의 선택만을 물을 뿐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다.”
—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시 스스로를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왜 나만 이렇게 뒤처진 것 같지?”
그렇다면 오늘, 기꺼이 흑역사를 하나 더 추가해 보는 건 어떨까.
실패해도 상관없는 아주 작은 행동 하나.
당신은 오늘 무엇을 시작해볼 생각인가.
25.12.28 레몬
다음 편 예고: "완벽주의라는 이름의 게으름 — 일단 시작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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