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라는 단어 앞에서
10월 26일.
첫날 피터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서에서(철학)
둘째 날 데미안(문학)
셋째 날 아주 작은 습관의 힘(과학)
3일 읽고 이틀쉬기.
개그맨 고명환이 전수한 부자가 되는 책읽기.
부자가 되려 책을 읽었지만 내 마음은 다른걸 보고 있었다.
피터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서를 처음 읽던날
나의 고통을 적날하게 텍스트로 적어 놓은게 환상적이였어.
특히 '피비린내'.
이 단어는 나의 고통의 핵을 설명하는 거 같았어.
난 단어를 아는게 별로 없었거든.
아프다.고통스럽다.
그런데 피비린내를 보는 순간 '이거'다.
내고통.
내 고통을 적날하게,
핵심의 날것을 찔러 표현한 단어를 봤을때 황홀했다고나 해야 하나?!
죽음의 수용서 책으로는 내 고통을 표현하는 말을 배워야 겠다. 생각하며 신이 났었지.
처음 읽을땐 극한의 고통을 어떻게 일반화 시키는지를 의식적으로 염두해 두며 읽기로 했었어.
하지만 내가 죽음의 수용서의 다음줄을 읽고 그 다음줄로 넘어갈때 잔혹함속에서 내 고통의 단위가 보였고, 내 고통은 전쟁통에서 느끼는 고통과 같았구나를 깨닫게 되었어.
그런데 그것이 카타르 시스가 느껴지는거야.
지금 나의 상태, 나의 지점, 나의 고통의 단위를 활자로 콕 꼬집어 적어 내려간 활자들은 내가 밟고 있는 압정판위의 살점이 눌리는 고통. 피붙은 발바닥의 고통이 전신을 압사시키는 고통을 피비린내 라는 네지로 압축시켜 놓은 것이었지.
카타르시스는 자신이 정확하게 설명될때 온다.
본다.
정확하게.
어설프면 더 아프다.
정확하게 봐야 보인다.
자신의 고통이.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입관할때 시체를 정확하게 정면으로 보라고 엄마가 조언해 주셨어.
엄마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쎴을때 엄마는 23살 이셨다고 해.
그때 시체를 처음보는 거라 너무 무서워서 힐긋 보셨데.
그런데 잠깐 어설프게 훑고 지나간 시체의 잔상이 지금까지도 그렇게 무서우시데.
그래서 정확히 봐야 무섭지 않다고 말씀해 주셨어.
나는 시어머니 시체가 입관이 되고 시체가 된 시어머니를
눈을 똑바로 뜨고 '정확하게 봐야지' 각오를 하고 천천히 뜯어 보았어.
백발이 된 머리카락, 자글거리는 주름진 얼굴을 따라 도포로 덮어진 손과 발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빠짐없이.
정확히 봤어.
저승사자 같네.
좀 섬뜩한데.
좀 무섭다.
하지만 무서움은 그때 잠깐이였지.
그 이후 지금까지도 무섭지는 않아.
사람의 심리도 시체를 보는것과 같아.
특히 자신의 심리를 정확히 봐야 해.
하지만 흔히들 사람들은 그 상처를 보는 것을 두려워해.
회피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지.
왜냐.
무섭거든.
무서움을 마주할 자신이 없거든.
하지만 모호한 상태의 심리는 자신을 더 무섭게 만들 뿐이야.
처음 책을 샀던 그때,
죽음의 수용서를 읽을수가 없었어.
너무 잔인해서.
너무 비참해서.
그때, 난 가성루게릭,가성치매가 올정도로 우울,무기력이 심했거든.
나 자신도 버거운데 이렇게 처참한 글까지 볼려니, 내가 소화를 못해내더라구.
내가 죽음의 수용서에서를 읽지못하고 책장에 꽂아 둔 이유이기도 하지.
이렇게 잔인한걸 사람들은 어떻게 읽어.
죽음의 수용서에는 조용히 책장속으로 가며 내게서 지워졌어.
그리고 난 그 책을 평생 읽지 못할 거라 생각 했어.
그런데 왠걸 내가 지금 이책을 읽고 있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네.
어떤한 감정의 동요도 없네.
되려 카타르 시스.
왠말.
독학으로 자가치유에 성공한 이후로 철학, 고전이 읽고 싶었어.
심리학,자기계발,에세이에는 전혀 관심이 안갔어.
운전을 할줄 아는 사람이 운전면허 책을 읽지는 않잖아.
난 단지 책의 분야를 옮겨간거라 생각했어.
왜~에~. 하나 마스터 하면 다음 쳅터로 옮겨가는 그런건줄 알았어.
하지만 지금보니 그게 아닌것같아.
이제 내가 그 책을 읽을 수준이 됐다는걸 무의식이 알고 있었던거지.
우쿨렐레를 배울때 안잡히는 코드가 있을때,
그 코트에서 다음 코드로 빠르게 자연스럽게 넘어 갈때까지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연습을 해.
그러다 보면 어느순간 이 한마디를 음악을 틀어놓고 쳐도 되겠다 느껴질때가 있어.
마음도 딱 그 코드 같은거야.
난 고통의 코드를 잡는 연습을 수개월을 연습한거지.
드디어 고통의 코드를 잡는 법을 몸이, 마음이 배운거야.
그래서 난 자가 치유 됐던거야.
자가치유가 되니 그 잔인하게만 느껴졌던 책.
피터프랭크의 죽음이 수용서를 읽을수 있는 공백이 생긴거야.
무의식은 그다음 쳅터로 가는거야.
음악 틀고 우쿨렐레 치며 노래 부르기.
여기서 중요한건 음악틀고 노래를 부르면 나에서 너에게로 뻗어 간다는거야.
듣는이가 생기거든.
그래서 자기사랑은 곧 이타심이야.
잔인하다, 잔혹하다로는,
감정표현으로 내 고통을 담아 내기 힘들어.
그래서 나는 보통의 날들이 존재할때 책을 읽어야 겠다고 느꼈다.
다양한 표현력이 필요한 이유는 고통의 크기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야.
독서의 이유는 이 한가지가 아니라는것,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본것은 이것야. 아니 내가 찾은 것은 이거였어.
독서의 의미를 단한가지로 이야기 하라면 난 언제나 이것을 이야기 할거야.
고통을 단위로 표현하기 위해 읽어야 한다.
처음에 정보를 얻기 위해 읽었어.
정보를 얻었더니
이제 표현하라네.
내마음을.
내 고통을.
그것도 아주.
정확히.
적날하게.
그러면 해방되.
고통으로 부터.
난 피비린내 네자로 과거의 가성치매,루게릭이였던 나와 현재의 고통에 있는 나를 동시에 마주하게 됐어.
그래서 난 고통으로 벗어 나는 공통점을 알게 된거야.
심리학자들은 말해.
마음을 정확하게 들여다 봐야 된다고.
그래서 그게 도대체 뭔데.
하지만 방법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
난 내 경험으로 알게 됐어.
그건
정확하게.
고통에게 이름을 붙여 줘야해.
내가 심리학 도서를 읽고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게 된건
불안이네.
외로움이네.
비참하다
이 정도수준이었어.
이정도로도 충분히 감정은 해방이 되.
하지만 더 적날하게 나의 상황과 고통을 표현하게 된다면 더 빠르게 회복이 되.
나는 지금도 고통속에 있지만 피비린내 라는 네자로 또다른 해방감을 느꼈거든.
그래서 더 적나라하게 표현할수록,
회복은 빨라진다는 합리적인 의혹이 생겼다.
오늘의 기록으로.
그래서 나는, 괜찮은 날들에도 짬짬히 읽어두는건 참 괜찮은 거란걸 알게 되었어.
내가 위험에 빠졌을때, 그 독서는 나를 구하게 될거야.
나의 감정을 적날하게 표현해 줄거거든.
적절한 단어로 적시에.
그리고 정확히 보는 눈을 가져다 주지.
자신이 고통에 빠졌을땐 늦었어.
책을 읽지 못하게 되거든.
부자가 되고 싶어서 철학,문학,과학책을 들었지만 결국 나의 고통을 통해 인간의 고통을 인류애라는 한단어를 쓰게 되는 문을 여는 통찰이 일어나게 됐던거지.
내가 통과한 이경험 속에서 인간이 보였어.
내가 존재론을 쓰게된건 그 때문이야.
물론, 이것이 내가 존재론을 쓰게된 전부의 이유는 아니지만, 그 일부로 중요한 부분이야.
25년 10월 26일은 내가 통과해온 고통과 경험과 통찰이 만나 인간을 보게된 첫날이였어.
나의 존재론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