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대로 안될때-개떡같은날
엿같은 날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일까.
성에 차게 못한 날일까.
새벽 4시 또 눈이 떠졌다.
보통, 대개는 새벽 6시에 일어난다.
층간소음 이슈로 바이탈이 깨져버린지는 오래다.
어제의 못다한 글쓰기가 나를 새벽부터 깨웠다.
열은 나지만 내몸은 어는새 책상앞에 앉았다.
습관은 병리학적 아프다보다 힘이 세다
여러해를 아프다보니 나는 늘 아픈상태에서 무언가를 해야 했다.
아프지 않은 날은 기다리기엔 나에겐 아프지 않는날이라는 가능성이 있는지 조차 가늠할수 없었기에 나는 움직여야 했다. 살아있는 상태는 숨이 붙은 상태가 아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먹고 자고 만으로는 살수가 없다.
하고싶다가 동반되어야만 참 괜찮다가 붙는다.
참 괜찮다는 자기만족이다.
아픈면서도 내가 움직이는 것은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참 괜찮다는 느낌을 가질수 있는 순간이 매력적이여서다. 매력적이다는 하고싶다에 행동이 붙을때 내가 나에게 붙여 줄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된다.
그래서 하고 싶다가 있는 사람에겐
아무것도 하지 않은날은,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나는 사실 새벽에 일어나 죽음의 수용소 3페이지를 읽고, 글한편을 적고, 쓰고 있는 존재론을 정리했다.
그리고 아침9시 도망치듯이 가방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언제나 그랬듯 웅~~~~~~이소리는 사람의 정신을 할퀸다.
층간소음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다.
정신에 균열을 만든다.
낯빛은 재빛이 되고, 목소리는 큰병이 난 사람처럼 시름시름 앓는다.
그리고 컨테이너로 가서 모든것을 놓는다.
손에는 든 휴대폰 속에서 쇼츠가 오간다.
두뇌는 회복이 필요할때 제일먼저 육체를 멈춘다.
할일은 산더미인데 육체가 멈춘순간 내 할일도 멈춘다.
그렇게 하루를 날리고 나면 나는 또다시 새벽에 일어나 아주 작은 몇가지 활동이 가능해 진다.
육체의 멈춤은 상실을 의미하는 동시에 두뇌의 회복이다.
무기력은 나쁜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뇌가 회복을 연습하는중이다.
두뇌에게 쉼은 무기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년간 이 넌덜머리나는 하루를 반복했다.
시끄럽고 그리고 나는 한다.
넋이 나가고 그리고 나는 한다.
그리고 패턴이 된다.
그 패턴은 회복탄력성 주기가 됐고
그 패턴을 우리는 습관이라 부른다.
나의 회복시간은 20시간 정도 된다.
하지만 나는 짜증이 난다.
매일 할일들이 밀리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것에 화가 난다.
행동이 욕심을 따라 오지 못할때 우리는 자신을 공격한다.
그리고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정말 그럴까.
나는 매일 아침 책을 읽고, 쪽글을 쓴다. 지금도 이렇게 브런치 연재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이리도 가혹하게 구는 것일까.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 검열은 높고, 빨리 성공하고 싶은 거리감만큼 자신에게 가혹한 기준의 잣대를 댄다.
이만큼은 해야 한다고.
채찍보다 당근이랬다.
자신이 어떠한 상황인지, 나의 고통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다.
제일먼저 나에게 말해보자.
힘들겠다.
상황이 엿같아서.
욕은 하고 싶지만 말버릇을 신경쓰며 구지 않는다.
엿같은 상황. 엿같은 행보.
그래서 뭐 니가 어쩔건데.
그래도 난 했다.
성에 차지 않아.
그래서 뭐 어쩔건데.
진짜 개 엿같다.
아직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것 같은것 같은가.
욕은 했지 않은가.
부조리한 세상과 공평하지 안은 설계값에.
그럼 됐다.
욕도 언어고, 언어가 인식을 바꾼다
뇌가 회복을 위해 몸을 멈췄을 때,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내 자아는 채찍을 든다. 그 채찍을 멈추게 하는 가장 빠르고 명확한 언어는 정제된 철학이 아니라, 날것의 욕설이다.
생각은 한끗 차이에서 달라 진다.
조사 하나가 방향을 바꾼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일까.
아니다
엿같은 날에도 나는 읽고,섰다
엿같은 날이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