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연애

(단편 픽션)연애가 어려운 이들이 강제로 연애프로그램에 투입된다면?

by 이우목


여러분. 『강제연애』,

라는 프로그램 제목이 다소 거북하게 느껴지시나요?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시나요. 사랑이란 본디 불가항력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간의 역사는, 결국, 우리가 사랑에 굴복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그들이 『강제연애』를 구상하며 가장 고민한 것은 ‘무엇’을 만들까가 아니라, ‘어떻게’ 구축하고 완성할지였다. 가령 건축에 비유하자면, 지면을 평탄하게 다지고 지반을 고르게 다듬는, 정지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일처럼. 프로그램의 총 구상 기간은 1년 2개월, 촬영 기간은 두 주였다. 핵심 모토, 혹은 기획 취지는 ‘각자의 사정으로 연애를 시도하기 어려운 솔로들이 두 주간 동거하며 의미 있는 인연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었다. 남녀 각각 네 명으로 구성된 출연자에게는 상당한 출연료가 지급될 예정이며, 기본적인 방향은 커플 매칭, 즉 연애 프로그램의 형식을 따르게 된다.


“그냥, 남자를 안 좋아해요. 좀, 싫어해요.”

그들이 민희에게 결함을 물었을 때, 민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그들은 불가피하게 출연자들의 사정을 결함이라 명명하기로 했다. 다소 자극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지니고 있기 마련인, 사랑으로 진입하는 ‘장벽이자 흠’을 가능한 한 부각하고자 한다는 게, 그들 나름의 변이자 변명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민희 씨는 페미니스트인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한때 관심이 있었던 적은 있지만…. 여성 인권은, 얼마큼은 향상됐다고 생각하고, 또….”


그들이 출연자를 섭외하며 중요하게 염두에 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외모가 상당히 준수해야 한다는 점, 다른 하나는 결함과는 별개로 ‘그럼에도’ 매력 있는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었다. 출연자의 나이대는 20대에서 30대까지 고르게 분포돼 있었다. 성적 지향은 헤테로섹슈얼이어야 하며, 직업의 유무는 참가 자격에 포함되지 않았다.

스물일곱 살 여성인 민희의 직업은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다. 민희를 포함한 출연자의 결함은 일정 기간 공개하지 않는 게 정해진 규칙이다. 제작진은 철저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출연자들의 결함을 검증했고, 특히 장시간의 인터뷰를 통해 심층적으로 그 내용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민희의 결함이, 연애를 시도하기에 충분히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다.


“그냥 타고난 것 같아요. 이스트 아시안에겐 절대로, 절대로 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해요. 매력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성적인 관계로 나아간다? 아… 그건 정말 안 되는 것 같아요.”

남성 참가자인 브라운은 한국에 거주 중인 미국인으로, 북유럽 계통을 떠올리게 하는 담백한 이목구비를 지녔다. 나이는 스물여덟.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한국인이나 동양인과의 연애 경험은 한 번도 없다. 브라운의 직업은 요리사다. 이태원의 한 미슐랭 스타급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며, 수년 내 자신의 가게를 창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성이 좋아, 동양인 여성 친구들과도 두루 어울리며 지낸다. 브라운의 인터뷰 장면 후에는, 그가 친구들과 허물없이 어울려 지내는 모습이 소개되기도 한다.


『강제연애』의 출연자들이 함께 지낼 공간은 성북동에 자리한 전용면적 231㎡의 2층 단독주택이다. 현관을 지나면 넓은 앞마당과 구석진 옆마당이 이어지고, 위층으로 오르면 소파가 놓인 발코니가 맞이한다. 침실은 1층과 2층에 각각 세 개씩 배치되어 있다. 각 방에는 욕실이 갖춰져 있으며, 출연자들은 2인 1실로 생활하게 된다. 옥상에는 거대한 어닝 아래 바비큐 기구와 테이블 세트가 마련돼 있어, 저녁 모임이나 흡연 장소로도 활용된다. 방과 거실의 귀퉁이에는 액션캠이 곳곳에 설치돼 있고, 야외에는 원격 제어 카메라들이 놓여있다. 정원의 담벼락에 달린 팬틸트 카메라는 수시로 눈동자처럼 방향을 바꾸고, 스태프가 직접 촬영하는 ENG 카메라도 여러 곳에 비치돼 있다. 끝없는 감시의 시선이 집 안을 뒤덮고 있고, 화장실만이 거의 유일한 은신처로 남아있다.


“의사 말로는, 중증 우울 삽화라고 하더라고요. 진단받은 지는 이제… 1년 정도 됐고요. 사실, 시작은 훨씬 전이에요, 고등학교 때부터 조금씩….”

체리는 참가자 중 유일하게 가명을 쓰기로 한 스물한 살 여성이다. 서울의 한 명문대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하고 있으며, 작고 동그란 얼굴에 밝은 인상을 지녔다. 현재는 학업 생활과 더불어, 의류 쇼핑몰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상을 꾸려가고 있다.

‘겉보기에는 밝고 씩씩해 보여요. 또, 인기도 많을 것 같구요. 그러면, 마음의 어려움 때문에 연애 의지가 없는 건가요?’

“밝아 보이는 건 그냥 겉모습일 뿐이에요. 속은, 불이 꺼진 방 같아요.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도, 결국 어떤 에너지가 있어야 피어나는 건데, 제 안에는 그 불씨가 아주 오래전부터 꺼져 있었거든요.”


회의 중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사랑은 단순히 감정과 동일시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닐 거라고. 상대와의 교감 속에서, 설렘, 걱정, 조바심, 기쁨과 슬픔, 벅참 같은 감정이 차곡히 쌓이고, 다시 판단의 필터를 거쳐 도출되는 개념일 거라고. 교감 속에서 생겨난 수많은 감정이, 이성과 감성의 거름망을 통과한 끝에야 비로소, 사랑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거라고. …그러니까, 감정은 사랑으로 자라나기도 하고, 그저 흩어져 버리기도 한다. 아주 작은 감정의 밀알이, 어느 날은 사랑으로 싹트지만, 또 다른 날엔, 바람에 흩날리듯 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마치 수만 년 동안 얼음 속에 잠들어 있던 씨앗이, 우연한 조건이 맞아떨어졌을 때, 비로소 꽃을 피워 올리는 것처럼.


‘배우자와 사별한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오 년 쯤 되었습니다.”

‘그간 연애 경험은 없으신 거죠?’

“네. 전혀요.”

서른넷의 윤기는 출연자 중 가장 연장자다. 앳된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그는, ○○그룹 본사의 오픈플로어 사무실에서 일하는 회사원이다. 대기업 특유의 광활하고 번잡한 공간 속에서, 매일 출입카드를 태그하고 23층 회의실을 오가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그런 윤기가 아내와 사별한 것은 신혼 초의 일이었다. 윤기의 아내는,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한 참사의 피해자였다. 두 사람은 3년간 연애했고, 결혼 생활은 1년 반에 그쳤다. 지금도 신혼집에 홀로 머무는 윤기는, 자신의 연애 의지가 ‘제로’에 가깝다고 느낀다. 『강제연애』에 출연하기로 한 건,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작은 시도이자 용기였다.


『강제연애』 출연자들에게는 지켜야 하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거주 공간에서는 개인적인 휴대폰 사용을 최대한 자제할 것.

둘째, 저녁 식사 시간에는 모두가 모일 것.

셋째, 저녁 식사 후, 취침 전까지는 한 명 이상의 이성과 같은 장소에서 함께할 것.(단, 샤워 등 일정 시간의 개인 정비 시간 및 휴식 시간은 제외한다.)

넷째, 매일 모든 이성과 최소 한 차례 이상 질문을 건네거나, 대화를 나눌 것.

다섯째, 매일 밤 9시 30분까지 ‘오늘 프리허그를 허락할 상대’를 선택할 것.


이상의 규칙을 어길 경우, 계약에 명시된 패널티가 부과된다.


그 외, 두 주 동안 출연자들은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을 수 없으며, 당연히 휴대폰을 통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다만 출연자들 간의 교제(혹은 연애)는 허용되는데, 거주지 안에서의 스킨십은 정해진 선을 넘을 수 없다. 기본적인 주류와 간식은 제공되며, 식사 비용과 데이트를 위한 소정의 경비 또한 지원된다. 거주 기간의 마지막 날, 출연자들은 ‘최종 선택’의 시간을 맞이한다. 선택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이 모든 규칙에는 강제력이 따른다.


비상계엄의 그림자가 한 해를 넘어 드리운 어느 일요일 오후. 여덟 사람이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나란히 몸을 붙여 앉았다. 계절은 이른 봄, 통창 너머의 마당에는 푸른 새싹이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정원수에도 서서히 생기가 번져가고 있었다. 한껏 꾸며 입은 그들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서로의 결함을 조심스레 더듬어보고 있었다. 맨 먼저 자리에 앉은 체리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출연자들을 일일이 맞았다. 짧은 질문으로 대화를 열고, 어색한 공기를 조금씩 흔드는 것도 그녀였다. 출연자들 대부분은 체리의 결함을 짐작하지 못했으나, 단 한 사람, 장소리만은 그것을 예리하게 꿰뚫고 있었다.


“체리 님이요.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아요. 그분 마음이 어쩐지 좀… 아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라면, 괜히 짐작해 죄송하네요.”

여성 출연자 장소리는 보브컷에 푸르스름한 염색을 한 머리로, 단번에 눈길을 끈다. 나이는 스물여섯, 직업은 유튜버다. 장소리는 오랫동안 우울증을 겪은 경험이 있다. 그래서일까. 애써 밝은 텐션을 드러내는 체리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멍울 같은 그늘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장소리의 결함은―여기서 ‘결함’이라는 말은 엄밀히 부적절하지만,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의 장벽이자 흠을 표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쓰기로 한다―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연애 경험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트라우마는 늘 관계의 문턱에서 그녀를 멈춰 세웠다. 남성성에 대한 장소리의 불투명한 불신은, 끝내 감당해야만 하는 장벽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소개와 가벼운 아이스브레이킹이 끝나자, 출연자들은 자유롭게 방을 나눠 짐을 풀었다. 누구는 룸메이트와 금세 친근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누구는 혼자 휴게실 소파에 앉아 여유를 즐겼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들 모두는 머릿속으로 방금 만난 이성들의 첫인상을 곱씹고 있었다. 출연자들 대부분이 호감 가는 외모와 선한 인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그 강약이 어떠하든, 몽글몽글한 기분이 드는 건 매한가지였다. 민희는 체리와 같은 방에 배정되었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민희는 체리가 낯선 환경과 새로운 만남 앞에서 혼란과 우울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체리의 눈에 비친 민희는, 다소 표독하고 다소 염세적인 모습이었는데, 어쩐지 그것을 애써 감추며 친절을 가장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체리는 그 가상의 이중성을 감각할 때마다, 그것을 쉽게 흘려넘기지 못하는 자신에게 극심한 염증을 느끼며, 자조적으로 순간을 견뎌내야 했다. 두 사람의 부드럽고도 까끌까끌한 대화는, 천장에 매달린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고 있었다.


“저는 넷카마입니다.”

남성 출연자인 장용철은 첫눈에 압도적인 인물이었다. 빼어난 용모와 커다란 풍채가 겹쳐져, 마치 존재만으로도 공간을 장악하는 듯했다. 서른의 나이, 슬릭백 헤어와 장난기 어린 눈빛에서는, 오히려 소년의 기색이 번져 나왔다.

‘출연 계기를 여쭤봐도 될까요?’

“솔직히 말해서… 음… 젤 큰 이윤, 흐흐. 식당 홍봅니다. 그냥… 무튼… 제 취미가, 음… 연애를 하는데 문제가 되는 건 사실이기도 하고요. 흐흐.”

장용철은 부천대 인근의 번화가에서 일식집을 운영한다. 연애 경험은 단 한 번, 그것도 6개월 남짓에 그쳤다. 낮에는 가게에서 일하고, 밤과 새벽에는 온라인에 접속해 여장 아이디로 활동하며 여성의 역할에 몰입한다. 그는 현실의 피상적인 관계보다, 넷카마로서 자아가 받는 관심과 교류에서 더 큰 만족을 느낀다. 최근 들어 식당의 실적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듯하자, 홍보를 겸한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에 지원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저녁 식사에 앞서 출연자들이 하나둘 거실에 모여 앉았다.

“용철 님이 제일 예측 불가예요.” 윤기가 말했다. 웃음기가 배어 있는, 부드러운 말투였다.

“윤기 님도 마찬가지예요, 흐흐. 아니, 근데… 여기 계신 분들 다 멀쩡∼ 해 보이시는데… 하하하.” 장용철이 과장된 웃음을 얹어 말했다. 그러자 거실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이를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민희가 차분히 응했다.

“멀쩡요? 멀쩡하지 않으면 대체 어떻길래?”

“아아, 그런 게 아니라! 하하, 아니요 아니요. 민희 님, 오해예요. 오해.”

“아녜요. 뭐, 다 그래서들 나온 거니까. 그냥 한 말이에요.” 민희의 목소리는 줄곧 차분했으나, 그 안에서 화가 섞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장용철은 내면의 명과 암이 밖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타입이다. 그의 낯빛에서 난처한 기색이 고스란히 번지자, 윤기는 공기를 바꾸려는 듯 저녁 식사 이야기를 꺼냈다. 때는 오후 네 시 무렵. 저녁 식사에 관한 고민이 이어지자, 자연스레 서로의 직업을 묻는 시간이 생겨났다. 누구나 이름을 알 만한 대기업에 다닌다는 윤기의 소개엔, 모두가 그럴 법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미묘한 긴장 속에서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왜였을까, 윤기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민희의 존재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그녀의 눈과 코, 입을 더듬듯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 전체의 조화를 살폈다. 하지만 시선을 거듭할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민희는, 윤기의 죽은 아내―정확히는 그녀의 이십 대 중반의 모습과 오묘하게 닮아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닮음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윤기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제작진의 의도 아래, 치밀하게 준비된 연출이었다. 한편 민희는 이성들의 언행을 나노 단위로 분석하고 평하고 있었고, 윤기 또한 그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민희는 고상하고 젠틀해 보이는 그의 내면에도, 어딘가 비릿한 다중성이 도사리고 있으리라 의심했다. 그 사이 윤기의 마음은 내내 복잡했다. 아내를 닮은 민희에게 끌리면서도, 동시에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첫날의 저녁 식사는 브라운이 맡아 준비했고, 체리와 장소리가 곁에서 손발을 맞췄다. 브라운은 주어진 식재료만으로도 훌륭한 만찬을 완성해냈다. 메뉴는 마늘과 올리브유, 페페론치노만으로 간결하게 빚어낸 알리오 올리오, 그리고 크리미한 노란빛이 은근히 흘러나오는 프렌치 오믈렛이었다. 미슐랭급 셰프의 정교한 솜씨가 스민 요리에 출연자들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고, 저녁의 분위기는 한층 더 고양되었다. 내내 차분한 표정만을 고수하던 민희의 얼굴에도, 이내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을 만큼. 민희는 같은 방을 쓰는 체리와 내내 자리를 함께했다. 체리는 막내다운 솔선으로 사람들을 챙겼고, 민희는 그 모습에 은근한 애정을 느꼈다. 하지만 저녁이 가까워 오자 체리의 마음은 불안정하게 오르내렸다. 감정을 감추려 애쓸수록, 행복은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는 듯했고, 혼돈을 품은 채, 침묵으로 스스로를 가둬야 했다. 그리고 그 공백을 메우려는 듯, 장소리가 이야기를 주도했다. 유튜버인 장소리는 언변이 능숙했고, 화두를 이끄는 솜씨 또한 빼어났다.

“네 번째 규칙, 다들 지키신 거예요? 응, 브라운 님? 하셨어요? 저는 일단 님한테는 했고요!” 장소리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 식으로 하는 거구나. 음, 그러면… 소리 님? 음… 아, 하하… 뭘 묻지? 흐흐… 흠, 응.” 질문을 찾지 못해 한동안 얼버무리던 브라운은, 이내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여기서, 우리가 가진 그걸… 결함이라고 부르잖아요. 그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아… 아!?” 브라운의 돌발적인 질문에 장소리는 눈만 크게 뜬 채, 당황한 기색으로 말끝을 삼켰다.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잠시의 정적을 깨듯, 민희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어그로 끄는 거죠 모. 우린, 어떤 식으로든, 그걸 받아들인 사람인 거고.” 그리고 민희는 곧이어, 마주 앉은 윤기에게 말했다. “윤기 님은요? 어떻게 생각해요?”

“오? 언니! 질문 되게 자연스러웠어요! 흐흐.” 장소리가 크게 웃자, 윤기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서, 윤기는 민희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민희 님 말대로, 저도 억지인 면이 있다곤 생각해요. 다만 편의상 ‘결함’이라 부르는 걸 테고요. 음… 제 경우는 그렇습니다. 여기 나오기로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 그 결함이라는 게… 괜스레 가련하더라고요. 결함? 결함이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싶기도 하구. 민희 님은 그런 생각 안 하세요?” 윤기 역시 네 번째 규칙을 자연스레 따랐다. 그런데, 왜였을까. 민희는 그의 질문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스스로의 결함을 가련하다… 그렇게 규정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혹감에 잠시 숨이 막힌 뒤, 민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민희를 응시하는 윤기의 눈이 깊고 짙고 애달팠다.

“딱히…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요. 우리가 아직은 모르니까요. 각자의 사정이 다 다를 테고. 또… 음… 근데 그, 결함은 언제 밝혀지는 거죠? 밝혀지는 건 맞나요?”


셋째 날, 늦은 저녁.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출연자 중 두 남녀가, 느닷없이, 교제를 선언한 것이다. 『강제연애』에서의 교제, 혹은 연애가 허용된다는 사실은, 출연진에게도 이미 안내된 바였다. 제작진이 이러한 조건을 둔 까닭은, 출연자들의 ‘결함’이야말로 연애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태를 전혀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본 셈이었다. 교제 선언의 주인공은 김민석과 롤라였다. 김민석은 스스로를 데미섹슈얼 성향의 무성애자로 규정하는 남성이며, 롤라는 아이돌 연습생 출신의 여성이다. 특히 롤라는 출연자 중 유일하게 서류상 ‘연애 금지’ 조항을 지닌 인물이다. 두 사람의 교제 선언 직후, 그들, 그리고 출연자들 간에는 크고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은 그것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고, 출연자들은 곧 하나의 이슈로 받아들이며 일상의 일부처럼 소화해 냈다.


숙소에서 넷째 날을 맞이하기까지, 출연자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이슈들이 쌓여 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관계에서의 무드는 눈에 띄게 다채로워졌다. 매일 밤 9시 30분, 가장 많은 프리허그 지목을 받은 이는 윤기였다. 장용철은 한 번도 지목받지 못했고, 김민석과 롤라는 날마다 서로를 선택해 총 여섯 번을 껴안았다. 여자 출연자 가운데서는 체리가 가장 많은 지목을 받았다. 민희는 깊은 고심 끝에 브라운을 두 차례 지목했고, 셋째 날과 넷째 날에는 윤기를 택했다. 그러나 윤기는 한 차례도 민희를 지목하지 않았다. 윤기는 담백한 태도로 체리와 장소리를 번갈아 골랐고, 셋째 날과 넷째 날에는 다시 체리를 선택했다. 민희는 그런 윤기의 선택에 은근한 서운함을 느꼈고, 그 감정은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섯째 날이 되자, 방이나 테라스, 정원 같은 사적인 공간에서 남녀가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9시 반의 프리허그 지목을 앞두고, 민희는 2층 테라스 정원에서 홀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세 번째 규칙을 의식하며 방황하던 윤기가, 벤치에 앉아 있는 민희를 발견했다. 민희는 반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윤기의 존재를 알아채지는 못했다. 윤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테라스 정원의 문을 열었다.

“뭐 하세요?”

“아, 저요? 그냥, 충전 중요.”

“음, 저도 잠깐 앉아도 되죠?”

“암요.”

윤기와 민희는 어젯밤의 일―민희의 지목으로 이어진, 짧은 포옹을 함께 떠올리며, 묘한 어색함에 잠겨 있었다. 윤기에게 그 순간은 여전히 뚜렷했다. 제안은 민희가 했지만, 먼저 다가가 그녀를 안은 것은 윤기였다. 윤기는 차오르는 망설임을 반작용으로 삼아, 단호하게 민희의 등을 감쌌다. 그날 밤, 민희는 몸이 더워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윤기의 옷도 얇았기에, 그의 피부의 물성과 온기가 고스란히 민희에게도 전해졌다. 두 사람이 포옹한 시간은 채 10초가 되지 않았다. 민희는 내심 그 순간이 조금 더 이어지기를 바랐지만, 곧 카메라의 존재가 신경에 걸렸다. 포옹은 독립된 공간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방 안에 다른 출연자가 없었고, 제작진도 카메라를 점검한 뒤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윤기는,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병을 다루듯 조심스레 몸을 떼었다. 그러곤 곧 고개를 깊게 숙이며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민희는 그런 윤기를 세세히 바라보며, 남자라는 존재에 대하여, 새삼스레 생각을 굴려보고 또 굴려보았다.

“벌써 5일 차예요.” 윤기는 여전히 민희를 대하는 것이 편안하지 않다. 시간이 흘러도 그녀의 모습은 볼수록 아내를 빼닮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럴 때마다 윤기는, 모종의 반동 심리에 사로잡힌다. 만약 그들, 즉, 제작진이, 자신이 그런 민희를 바라보다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갈 것이라 믿었다면―그러니까, 그런 의도 아래 연출을 짰다면―그것은 큰 오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환경은 좀… 적응되셨어요?” 윤기가 물었다.

“아, 글쎄요.” 말은 나왔지만, 그 뒤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윤기에게만큼은, 다른 남자들에게처럼 가볍게 꾸며낸 응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 머뭇거리던 민희는 마침내 덧붙였다. “들쭉날쭉해요. 대체로는 괜찮은데.”

“그죠? 참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곳이에요. 여기가.”

“맞아요. 공, 감, 합니다.” 그때, 왜였을까. 민희는 오전 내 이불에 몸을 묻고 있던 체리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오일 간 함께 지내는 동안, 민희는 체리의 결함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민희의 눈에는, 체리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동굴이 보였다. 체리가 애써 목청을 높일 때마다, 동굴은 공허한 메아리로 울려 퍼졌고, 숨죽여 움츠릴 때면 차가운 진동의 침묵이 흐르는 듯했다.

매일 밤 잠에 들기 전, 민희와 체리는 오래도록 속마음을 나누곤 했다. 그 자리에서 체리는 윤기에 대해 “따뜻한 사람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어 어쩐지 아빠 같은 느낌이 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희는 그 말들을 완전하게 이해할 순 없었다. 지난 세 번의 짧고 긴 연애를 겪으며, 민희가 얻은 결론은 하나였다. 남자는 결국 다 똑같은 ○○○이라는 것…. 민희는 여성의 몸과는 다른, 크고 강인한 남성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우월의식을 여실히 경험했고, 그로부터 고통받았다. 그들―남자들은, 민희의 아버지처럼 하나같이 억압적이고 권위적이었다.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물론 그것은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른다. 민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민희가 살아온 세계의 전부였기에, 민희는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니, 그러므로, 민희는 여전히 남자에 대한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이를테면 로또 당첨을 기다리는 것처럼, 모종의 요행에 불과할 뿐이다.


“밖이 많이 춥네요.” 윤기가 말을 꺼내자, 민희는 혹여 그가 겉옷을 벗어주거나 담요를 가져다주지는 않을까, 괜한 노파심이 일었다. 실제로 날씨는, 그의 말처럼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종전부터 몸이 으슬으슬했지만,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괜스레 기지개를 길게 켜며, 느긋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그런가요? 추운가? 음… 그런가? 음….”

“흐흐.” 윤기가 짧게 웃었다.

“왜, 왜요?”

“아니요. 아니요. 그냥요.”

“흠….”

시간이 9시 30분에 가까워지자, 윤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희는 그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몸을 움츠렸다. 문득 마음이 푹 가라앉는 기분이 스치자, 다시 한번 생각을 굴리고 또 굴리게 되었다. 감정이란, 참 이상하다. 좋은 기분이 온전히 100이 되는 순간은―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결코 찾아오지 않는 듯했다. 오늘 민희는 오전 내내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마음 한구석이 잘게 부서져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듯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러나 민희를 더 힘들게 한 것은, 그 이유 자체가 아니라 행복이란 언제나 결핍을 동반한다는 사실, 그 ‘작은 불행의 항상성’이었다. 민희는 거기서 원통함을 느꼈다. 그것이 지긋지긋했고, 끝내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프리허그 지목을 앞두고, 민희와 장용철 사이에 작은 언쟁이 일어났다.

“민희 씨는 남자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아∼ 하하하.”

가볍게 오가던 대화 중에 불쑥 튀어나온 장용철의 농담이었다. 민희도, 다른 출연진도, 그 말이 웃고 넘길 만한 가벼운 농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좌중에 침묵이 흘렀고, 그것이 민희를 난처하게 했다. 민희는 괜스레 심술이 나 말했다.

“그건 남자 바이 남자죠.”

그런데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은 마치 ‘당신은 예외일 수도 있어요’라고 속삭이는 듯했고, 그래서 민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곧 장소리와 브라운이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는 금세 풀려나갔다.

9시 30분이 되자, 거실의 모니터가 불을 밝히며 재생을 시작했다.


오늘의 프리허그 대상 지목 시간입니다.

오늘의 허그는, 내일 있을 ‘결함 공개’를 앞두고 진행됩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상대를 지목해 주세요.


거실에 탄식이 흘렀다. 결함 공개라니, 윤기 역시 당혹스러웠다. 오늘 윤기는, 프리허그의 대상으로 민희를 지목할 생각이었다. 포옹을 나누고 대화를 이어가며, 민희를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요 며칠 인터뷰를 할 때마다, 윤기는 그들로부터 죽은 아내에 관한 질문을 종종 받았더랬다. 그럴 때마다 윤기는, 아내의 존재와 그날의 참사, 민희… 그리고 이 세계가 지닌 필연적 결함을 함께 떠올렸다. 생각은 더 나아가, 비상계엄의 여파가 가라앉은 뒤에도 여전히 뒤숭숭한 시국으로까지 뻗어갔다. 머릿속이 복잡했고,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다

지목과 통보는 메신저로 이루어졌다. 지목에 앞서 브라운은, “소리, 오늘따라 머리색이 유난히 뷰리풀 해∼.”라며 능글맞게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김민석과 롤라는 오늘도 서로를 택했고, 장소리는 윤기를 골랐다. 체리는 긴 망설임 끝에 윤기를 지목했고, 민희 역시 체리와 다르지 않았다. 윤기는 세 여성의 선택이 자신에게 모아진 줄 모른 채, 오늘도 체리를 허그 상대로 택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감정이 오르내리듯 보이던 체리가, 내심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허그 시간은 짧고, 고요했다. 김민석과 롤라만이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을 뿐. 내일 예정된 결함 공개가, 모두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포옹에서 체리는, 윤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방금 건넨 윤기의 한마디가, 심중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럼… 작은 위로라 생각하며, 안겠습니다.”

“윤기 님은 아셨어요?” 체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뭘요?”

“전 들어와서 알았어요. 미리 들었을 텐데…. 여기서 우리들 그걸… 결함이라고 하는 거요.”

그 말을 듣고 윤기는, 이 여자 어딘가 좀… 맹한 구석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결함’이라는 말과 그에 대한 그들의 양해는, 이미 수차례씩 들어온 터였다. ‘결함’이라는 말, 윤기는 그것을, 편의상 붙여둔 대체어쯤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결함’이 아니라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 불행, 결점, 혹은 애로사항? 하지만 그 이름이 어떠하든, 연애—아니, 사랑을 가로막는 문제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터였다. 윤기는 체리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내일, 서로의 ‘결함’이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성심을 다해 위로를 건네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잠시 뒤, 메시지를 받고 방을 옮긴 윤기는, 민희를 만나 포옹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의 결함은 과연 무얼까. 그리고 그 결함을 드러낸 이후로,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

한편 민희는 ‘결함이 밝혀지면 윤기의 태도는 분명 달라지겠지’ 하고 생각하다가, 곧바로 ‘아니,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라며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그러곤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작은 불행의 항상성… 또다시 불현듯, 마음 저편에 새겨진, 자글자글한 잔주름이 짚이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결함 공개를 앞두고 출연진들이 거실에 모였다. 가장 먼저 나타난 이는 체리였다. 체리는 오늘따라 한결 밝아 보였다. 해맑은 얼굴로 사람들을 맞으며, 늦는 이들까지 살뜰히 챙겼다. 제일 늦게 모습을 드러낸 이는 장용철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투명하게 묻어났다. 한편, 모니터를 응시하며 숨을 고르던 민희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미리 걱정하지 말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도 미리 단정하지 말자.

윤기는 묵묵히 진행을 기다렸다. 결함 공개는 이미 각오해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제 입으로 전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큰 짐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담담히 전할 생각이었다. 마치 어제의 일기장을 읽듯, 무덤덤하고 건조하게.


결함 공개는 거실에 앉은 채로 진행되었다. 순서는 그들―제작진이 정해주었다. 첫 고백의 포문은 장소리가 열었다. 이어 장용철, 김민석, 롤라, 브라운, 체리가 차례로 나섰고, 윤기 다음으로 마지막 순서는 민희였다. 성폭력 피해 경험에 관한 장소리의 고백은 덤덤하게 흘러나왔다. 장소리의 고백 후에는 짧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용기에 대한 격려가 담긴, 조용한 박수였다. 가장 열심히 손뼉을 친 이는 장용철이었고, 민희만은 홀로 박수를 치지 않았다. 민희는 그저 엄숙한 얼굴로 윤기를 흘깃 보았을 뿐이다. 윤기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을 천천히 모았다 떼며 박수에 동참했다. 고백이 끝난 뒤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 주어졌으나, 누구도 그에 관해 말을 보태지 않았다.


“넷까마? 넷까마가 뭐예요?”

수줍게 내뱉은 장용철의 고백 뒤에 브라운이 던진 물음이었다. 장용철이 “아, 넷까마가 아니라… 네, 넷카마라고….” 하며 더듬거리자, 민희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렇지, 하는 깨달음, 그리고 냉소가 섞인 웃음이었다.


체리의 고백은 유난히 길게 이어졌다. 병세의 심각함과 그 오랜 지속, 그것이 어떻게 일상과 연애를 힘들게 했는지…. 고백 내내 체리는 울먹이는 듯했으나, 끝내 눈물을 삼켰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여러 응원의 말과 질문이 쏟아졌다.

“여기 들어와서는 어때? 아직도 연애… 누굴 만나는 게 어렵다고 생각해?” 장소리의 솔직한 물음. 체리는 그에 대해 “글쎄요. 모….” 하고 운을 떼며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체리의 엄중했던 고백과는 달리, 다른 이들의 반응은 희망의 기운을 띠고 있는 듯 보였다. 체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정말 그런 걸까. 어쩌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또 하나의 진실일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대화가 끝난 뒤, 다시 한번 박수가 터져 나왔다. 민희는 여전히 그것―체리의 말에 박수를 치는 일이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다.

윤기는 누구보다 소상하게 사연을 고백했다. 마치 그에 대한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지닌 사람처럼. 내내 그는 의도적으로 민희의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아내를 닮은 그녀의 눈을 보며 죽은 아내를 이야기하는 것은 차마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을 잇는 동안, 예상치 못한 감각이 스쳤다. 맞은편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민희의 시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은 외면하려 해도 피할 수 없을 만큼 꾸준하고 열띤 응시였다. 결국, 윤기는 민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죽음을 말하며 아내를 닮은 여자를 보는 일… 생각하는 일… 그 순간의 감정은, 가령 마음속에서 불과 기름이 섞여 일렁이는 일처럼, 거칠고 뜨거웠다. 그 열기가 가슴께에 고여 있는 것을 느끼며, 윤기는 고백을 끝냈다. 그리고 그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민희가 먼저 질문을 건넸다. 질문. 그런데 그건 과연 질문이 맞았을까.

“오 년… 이면, 마음이 어떨지 모르겠네요. 여기에 출연한 이유? 목적도 궁금하구….”

민희의 말에 윤기는 곧장 친절히 답했다.

“좋지 않은 마음이, 당연히 남아있죠. 그 마음을 덜고 싶어 나왔구요.”

“연애가, 하고 싶으세요?” 민희가 물었다. 어찌 보면 도발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법한 질문이었는데, 어투는 느릿하고 차분했다.

“음… 이건 말씀 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지금은, 연애가 어떤… 목적? 숙제? 같은 느낌으로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윤기는 곰곰 생각한 뒤, 다시 말을 잇는다. “다만… 음…… 다만 다만 다만… 스으…… 음. 제가 좀… 긴 수다를 떨어야 될 거 같은데요?”

민희와 다른 출연진은 흥미로운 얼굴로 윤기의 말을 기다렸다. 윤기의 말은 예고대로 제법 길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인간에게 생과 죽음이 있는 한, 세상에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이별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모든 인간의 수에 연애한 횟수인 둘, 셋, 넷… 을 곱한다면 수억, 수십억, 그보다도 더 많은 이별이 있었고,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나의 이별을 편의상 ‘결함’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결함, 어쩌면 그것은 각각의 개인―하나의 거대한 우주가, 반드시 거쳐야 할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하나의 우주로서 그 결함을 겪었고,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 얼마큼의 먹먹함, 상실감, 우울감… 세상의 절반이 뚝 떨어져 나간 듯한 감각과 마주하는 일. 그것이 나의 결함이다. 그런데 결코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던 그 일이, 어느 순간엔가 마치 숨 쉬듯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깨닫곤 한다.

“…그러니 그냥 살아보려구요. 결함이든 무엇이든, 그냥, 겸허히 받아들이며, 기다리면서, 살아보려구요.”

윤기의 말이 모두 끝나자 좌중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민희가 입을 열었다. 민희는 묻고 또 물었고, 때로는 비슷한 질문을 변주해 건네기도 하며 연이어 말을 잇는다. 그러다 보니, 대화는 오직 두 사람―윤기와 민희만의 시간처럼 흘러갔고, 다른 이들은 침묵했다. 다음은 마지막 차례인, 민희가 고백할 순서다. 그러나 민희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여전히 대화를 질질 끌고 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그들―제작진이 나섰다. 수군수군. 수군수군. 민희가 얼굴을 붉혔다. 윤기를 응시하며. 이제, 민희의 차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