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픽션)'혼자인 값'에 대한 한 남자의 궁상스러운 비연애 연애담
L의 입장에서 나영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여러 면에서 이상형에 가까우면서도,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앞둔 여자.
그리고 조금 덧붙이자면,
하루 종일 L의 무기력을 조장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
운명의 여인—그렇게, 잠시나마 나영을 여겼던 L은 이번마저도 아니면 대체 언제인가 하는 생각을 좀처럼 떨칠 수 없었다. 작위적인 만남을 피하고자 스스로 택해 온 방식들이었다. 독서 모임에 나가고, 문화센터에서 주관하는 강좌에 참여하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동남아 자유여행 패키지에 몸을 실은 것도. 나영을 만나게 된 수어 수업에 참여한 것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L은 그런 시도들이 모종의 확률을, 아주 조금이라도 높여 줄 것이라 믿었다. 이를테면,
① 사회정서적으로 ‘교제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연령대의 여인을 만날 확률,
② 그 여인의 신체 조건이 L이 생각하는 기준에 대체로 부합할 가능성,
③ 그 여인의 성정과 교양, 문화적 관심사가 자신의 것과 대동소이하거나 최소한 결이 맞을 개연성,
④ 그 여인이 현재 솔로이거나, 머지않아 솔로가 될 예정일 여지,
⑤ 그리고 위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여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L에게 호감을 느낄 확률.
L은 나영을 만난 첫날, ①과 ②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수업이 진행되는 첫 두 주 동안에는 다소간의 ③을 인지했고, 석 주 차에 이르러 우연히 ④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강의실은 늘 소란스러웠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여기저기서 사소한 대화들이 겹쳐 흘러나왔다. L은 나영과 마주 앉아 간단한 인사를 나눴고, 그 짧은 순간에 ①과 ②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확인이라는 말이 과장이라면, 적어도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있었다. 그 직후였다.
“정말이요?”
“축하해요.”
“결혼이요?”
“반년 남았다고요?”
“12월쯤이면…”
단어들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지만, L은 거의 즉각적으로 그것이 나영의 이야기임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잠깐 높아졌고, 웃음이 이어졌으며, 나영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L은 그 자리에서 ④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었다.
당연히 낙담했다. 수없이 겪어왔고,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마주하자 실망감이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마다 늘 처음 겪는 사람처럼 굳어 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유지하는 데에만도 적잖은 힘이 들었다.
수업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L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영의 ③을 인지하게 되었다. 말의 리듬, 웃음의 간격, 사소한 반응들.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상태에서 뒤늦게 포착되는 감각들이었다. 그것들이 확인될수록 상황은 더 또렷해졌고, 그래서 더 피로해졌다.
해가 거듭될수록 L은 점점 더 분명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①과 ②, 그리고 ③의 확률은 언제나 확인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줄어든다는 사실을.
석 주가 지나면서 수강생들 사이의 관계도 조금씩 느슨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엮여 갔다. 개인마다 학습 능력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 웃고, 어르고, 달래 가며 자연스럽게 정을 쌓아 나갔다. 학생, 회사원, 공무원, 자영업자, 전업주부. 구성원의 배경은 제각각이었으나, 반장인 나영을 중심으로 묘하게 균형 잡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나영은 석 주 차 무렵, <사랑의 수어 한마당> 참여를 계기로 반장으로 선출되었다.
L은 종종 수업에서 나영과 파트너가 되었다. 그는 이미 나영의 ①과 ②, 그리고 다소간의 ③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관계는 무난한 선에서 유지되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도, 그렇다고 어색해지지도 않는 거리였다. 간혹 마음이 일렁이는 순간도 있었으나, ④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런 감정은 금세 가라앉았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에게 반복해 온 규칙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나영이 반장이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단체 채팅방을 개설하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단체 회식이 제안되었다. L은 잠시 망설였지만, 다른 수강생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처음에는 명확한 의사를 밝히지 않았고, 결국 분위기에 떠밀리듯 회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회식은 그렇게 정해졌고, 특별할 것 없이 예정된 날에 열렸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오래 자리에 남았고, 자리는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또 그다음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회식은 3차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날 밤, 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단체 채팅방에는 L을 언급하는 메시지들이 계속 올라왔다.
-오늘 정말 L 씨가 다했어요.
-맞아요.
-L 오빠 너무 웃겨요.
-진짜 L 형, 반전이야, 반전.
갈림길에서 인사를 나눈 뒤, L은 남은 몇몇과 함께 전철에 올랐다. 잠시 후 빈자리가 하나 생겼고, 그는 나영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두 사람은 특별할 것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수업 이야기, 일 이야기,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있는 말들. 그 와중에도 L은 나영의 ①과 ②, 그리고 다소간의 ③을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④를 떠올렸다. 그 생각은 늘 그렇듯, 감정을 적당한 선에서 눌러 주었다.
나영보다 두 정거장 먼저 하차한 뒤, 혼자가 되자 L은 갑작스럽게 피로를 느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거워졌다. 곧 우울과 권태가 겹쳐 밀려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반복되어 온, 낯설지 않은 무력감이었다. 그는 그것이 이미 여러 번 겪어 본 감정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피곤해졌다.
-L아
-뭐해?
-집이야?
-보면 바로 전화 좀,
근정에게서 메시지가 온 건, 방 안이 지나치게 조용해진 저녁 무렵이었다. L은 서적이 켜켜이 쌓인 방 안에서 소설을 읽고 있었다. 배수아의 『뱀과 물』. L은 왜인지 모르게, 뚜렷한 이유 없이 그 소설이 좋았다.
-…너도 들었는진 모르겠는데 지금 난리가 아니다.
-일단 톡 보면 바로 전화 좀.
알림창에 뜬 메시지를 보았다.
장문의 메시지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하란의 이름이었다. 뒤이어 ㅠㅠㅠ, 어쩌냐, 아이고…… 같은 말이 이어졌고, 바로 전화를 해달라는 말도 보였다. L은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00:01 00:02
“그래, 집이야? 잠깐만.”
근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L은, 응? 이게 무슨 말인데?” 되물었다. 답이 이어지지 않자 화면을 보니,
00:10 00:11 00:12
“아, 정말.”
한숨이 들려왔다. 한동안 전화기 너머에서 잡음이 이어졌다.
“직진이요, 계속 쭉 직진이요, 저기, 저쪽에 터널 보이죠?”
L이 알기로 근정의 차에는 내비게이션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 그녀는 차 안에 있지 않을 거라는 추측이 들었다.
“미안 미안, 나 곧 내리거든? 내리면 바로 연락할게.”
00:31
다시 창을 보았다. ‘하란’, ‘안 좋은 일’, ‘어제’—형광펜으로 그어놓은 듯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단어들이 있었다. 당연히 안 좋은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소개팅 당사자인 하란이 아니라, 그 주선자인 근정이 연락을 해왔다는 점에서, L은 그것이 파투 소식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물론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빨리 좀 말해봐.”
수다가 이어지는 가운데 째깍째깍 지시등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들려오는 잡음으로 보아 근정은 여전히 차 안인 듯싶다.
“잠깐. 다 왔거든. 나 이제 거의 정문 앞이야.”
근정은 주위를 의식하는 듯 목소리를 낮추어가며 말했다.
머지않아 노이즈가 걷히고, 한 층 선명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뭔 일인지 모르겠다 정말….”
황당하다, 어이없다, 미치겠다는 표현과 함께 자조 섞인 한탄이 이어졌다. 연극의 방백처럼 흘러나오는 그의 말들에 대해 L이 할 수 있었던 건 “응,” “어,” “어?” 같은 짧은 추임새를 덧붙이는 것뿐이었다.
“…여하간, 그래, L아.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의 말에 L은 “그래, 알겠어…”라며 어물쩍 얼버무렸다.
얼마쯤 더 시간이 지났을까. L은 통화 내내 자신이 단 한 번도 감정을 제대로 쏟아내지 못했음을 떠올렸다. 순간순간 “어, 어?”, “아!” 같은 소리를 내긴 했지만, 마음속에 진하게 남아 있던 감정들—이를테면 당황함, 불안함, 끔찍함, 오싹함 같은 것… 그 어느 것도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일주일 전, L은 하란의 번호를 저장하자마자 곧바로 카카오톡 프로필을 확인했다. 가장 궁금했던 건 사진이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프로필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짧은 문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노래 제목이거나 가사, 혹은 아포리즘 같은 문장들이었다. 그중에는 영화 스틸컷이나 포스터도 있었는데,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멜랑콜리아」, 「판타스틱 우먼」 같은 예술영화들이었다.
L은 하란의 프로필을 시간의 역순으로 천천히 훑어내리며, 자신의 것을 빼닮은 그녀의 취향과 취미에 묘한 인상을 받았다. 소개팅의 장점이라면 처음부터 ①과 ④를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일 텐데, 그에 더해 ③까지 확보된 기분이랄까.
프로필뮤직도 있었다. 전진희의 「쓸쓸」, 프롬의 「Milan Blue」, 다린의 「가을」, 강아솔의 「섬」 같은 인디풍의 곡들. 그것 또한 L의 기호와 닮아 있었다. 현재의 프로필뮤직은 선우정아의 「Far away」, 프로필 사진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스틸컷 중 하나였다.
L은 조제의 얼굴—혹은 표정, 눈빛—을 바라보다가 ‘어떠한’ 감흥을 느꼈고, 그 감정을 소개팅 자리에서 언급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떠올리기도 했다.
-형, 자?
-자면 내일 답해주고,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야,
-내일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 오전 12:18.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이거다, 하고 와닿는 이유는 없었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가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었다.
아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L은 근정에게 의사를 전한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이유를 찾는 데 몰두했다. 동선을 그려보았다. 차에서 내려 빈소로 향하고, 얼마간 걸어 도착하고,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조문객을 만나고…. 어째서인지 그 다음 장면은 그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득 잠이 든 건 새벽 두 시 무렵이었다. 내내 선잠만 이어가다가, 여섯 시 정각, 모닝콜에 맞춰 눈을 떴다. 씻기 전, L은 검은색 정장을 찾아보았다. 추측이 맞는다면 그 옷은 안방 서랍장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일찍 학교에 도착한 L은 행정실에 들러 봉투 한 장을 챙겼다. 협의실로 올라가니 아직 출근한 이는 없었다. L은 5만 원을 봉투에 넣고, ‘□□□중학교’라고까지만 적은 뒤 이너포켓에 넣었다.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소개팅이 성사되었더라면,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썼을 것이다.
PC를 켠 L은 업무포털에 접속했다. 알림란에 들어가 ‘임하란’을 입력하려는 순간, 모니터의 중앙에서,
[부고] ○○○○중학교 교사 임하란 님 장례식 알림
이 보였고, 때마침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근정의 답신이었다. L은 퇴근 후 곧장 그곳으로 가겠다고 답한 후 다시 부고란을 보았다.
◇ 빈소: □□□병원 장례식장 201호, 전화: 032-○○○-○○○○
◇ 발인: 10월 2일
◇ 장지: ○○가족공원
◇ 연락처: 010-○○○○-○○○○ (□□□) 농협 ○○○-○○○○-○○○○-○○
빈소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근정은 “왜?”라고 묻지 않고, “응?” 하며 되물었다. L이 답장을 하지 않자, 그는 곧이어 메시지를 하나 더 보내왔다.
-너가 오게? 곧바로 퇴근할 거 같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자 L은 창을 닫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학교야?”
근정이 물었다. L은 자신이 우회해 가더라도 근정의 학교를 경유해 가겠다고 했다. 형은 술을 마실지도 모르니 오히려 그편이 낫지 않겠냐고도. 서둘러 나갈 것이니 기다릴 필요가 없을 거라고도.
통화를 마친 뒤, L은 실시간 검색어와 인터넷 기사들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수업 시간이 가까워졌고, 교무실엔 부산한 분위기가 돌기 시작했다. 동료 교사들도 하나둘 밖으로 나섰다. L은 휴대폰을 무음으로 전환한 뒤, 조용히 복도를 빠져나왔다.
후관동을 향해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했다.
…기억이 맞다면, 먼저 의중을 내비친 건 자신이었다.
“요즘 부쩍 외롭네. 눈 깜짝할 새 폭염은 꺾여 있고, 어젯밤엔 ‘올가을은 이제 죽었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나영과의 속사정에 대해서도 실없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나영에게 느꼈던 ①과 ②, 다소간의 ③, 그리고 점점 제로에 가까워지는 ④와 ⑤에 대해서. 그런 현실에 치받쳐 ‘그런 여인’을 ‘운명의 여인’이라 치부하게 되는, 비약적인 사고에 대해서도.
근정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말이야. 이 형님이 전부터 염두에 둔 여인이 하나 있기는 한데…”
“센치한 구석이 있긴 한데, 이 조직에 그만한 인물은 또 없다.”
근정이 그렇게 말하자, L은 “그렇게나 괜찮아?” 하고 화색을 띠며 물었다.
근정은 돌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요지는 이러했다.
그녀에겐 햇수로 오륙 년 정도 만난 애인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애인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다. 시인이라는 말도 있고, 연극배우라는 얘기도 있으며, 영화배우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었다. 나이는 서른넷. 오랜 시간 사귄 애인이 있었고, 나이도 있으니 곧 결혼 소식이 들려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자신과 함께 일하는 동안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 들은 바에 따르면, 그와 헤어지고 지금은 싱글이라는 얘기였다.
뭐, 여하간,
아직은 소문에 불과하니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정식으로 주선을 해 보겠다며 근정은 L에게 재차 의사를 물었다. L은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근정은 이틀 후 메시지를 보내왔다.
-임하란, 010-○○○○-○○○○.
-인마.
-현재 솔로시란다.
-얘기 잘 해뒀으니까 한번 연락해봐ㅎㅎㅎ.
멀리, 근정이 보였다. 그가 손을 들어 알은체를 하자, L은 클랙슨을 가볍게 두드려 응수했다.
“미안. 가볼까?”
“응.”
“아, 내가 □□□라고 말했나?”
“응, 했어.”
빈소까지는 차로 이십 분 남짓한 거리였다. 모퉁이를 돌아 대로로 진입하는 동안, L은 근정이 먼저 말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대로를 달리고, 터널을 지나고, 러시아워의 오거리를 통과하는 내내 근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자 둘 사이엔 어색한 기류가 흘렀고, L은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탓에 섣불리 입을 떼기도 더 어려워졌다. 고심 끝에, 다른 화제로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문득 근정이 다녀왔다는 해외 워크숍이 떠올랐다.
“어디랬더라? 마카오? 괜찮았어요?”
근정은 심천, 마카오, 홍콩. 재미는, 말도 마라,라며 운을 떼더니 기다렸다는 말을 술술 이었다. 술로 시작돼 술로 점철된 여정이었다고 했다. 연이은 숙취 탓에 최악의 컨디션으로 스케줄을 이어가야 했다. 가탈스런 교장‧교감을 수행하는 것도 모자라 빡빡한 패키지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단체생활의 이중고’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여행이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다음부터는 구라를 쳐서라도 내빼야지 원.
L은 근정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레 석 달 전 자신의 여행이 떠올랐다. 싱가포르. 생애 처음으로 떠난 해외 자유여행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숙박을 결제할 때, ‘싱글차지’라며 이십여 만 원을 더 지불했다. 막연한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부당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혼자인 값, 이라고 하기로 했다. 혼자이기 위해, 혼자이기 때문에 응당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라고. 어떤 일에 가치나 장점이 있다면, 그에 따른 마땅한 차지(charge)가 있기 마련이라고. 다만 근정의 경우는 그 비용을 절감한 대신, ‘여럿인 값’을 지불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무언가 대가가 따르는 일에는, 언제나 불이익도 함께 오는 법이라며.
주차장은 약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음식특화거리가 조성된, 부산한 거리를 통과해야 했다. 문전성시를 이루던 한 가게 앞을 지나가던 때였다. L은 툭 내던지듯,
“그래서,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된 거래?” 하고 물었다.
“응?”
근정은 처음에는 못 알아들은 눈치였으나 이윽고 응… 하며 말을 이었다.
“실족사였대. 혼자 여행 가서.”
거기까지 말한 후 근정은 상세한 대화는 안에서 나누자는 듯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한순간 둘 사이의 거리가 두어 걸음씩이나 벌어질 만큼. L의 머리에선 ‘실족’이란 말이 아릿하게 맴돌았다. 실족… 이라면 누가, 어디서 ‘실’을 목격했을까. 언제, 어떤 연유로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방파제에서? 리조트의 테라스에서? 과음이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사정 때문에?
모니터에는 두 여인의 사진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고 있었다. 하나는 머리가 성성한 노인이고, 다른 하나는 선명한 이목구비에 짙은 눈썹, 머리를 뒤로 묶은 젊은 여인이다.
근정의 인사는 왼쪽, 삼인용 소파가 놓인 방향을 향했다. 그곳엔 부장교사쯤 되어 보이는 남성과, 이십 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L은 가볍게 묵례를 건넨 뒤, 다시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웃는 상. 한눈에 그런 인상을 받았다. 차분한 표정 위로 온화한 미소가 퍼져 있었다. 앞머리 일부는 뭉치로 넘겨져 귓불이 드러나 있었고, 풍성한 뒷머리는 턱선 부근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어딘가가 앙증맞다. 눈도, 콧방울도, 입술도. 소담한 크기의 이목구비인데, 전체적으로 조화가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L은 살아생전의 그녀를 본 적이 없었기에, 사진이 주는 괴리감—이를테면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이 겹쳐지는—을 느끼지 못했다. 달리 말해, 하란은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공상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빈소는 제법 규모가 있어 보였다. 비닐을 깐 탁자가 가로로 다섯 줄, 세로로는 네 줄쯤. 옆 공간에도 탁자 몇 개가 더 놓여 있었다. 아직 오후 일곱 시에 불과했으므로, 조문객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L은 돌연 눈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손으로 눈을 벅벅 문질렀더니 시야가 부옇게 번지고 말았다. 고개를 들자 근정이 구부정한 자세로 부의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건 그보다 조금 앞선 시간―그러니까, 주차장으로 들어서려던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턱과 이마에서는 열기가 오르고, 입안은 바짝 마른 느낌이 들었다. 후 하고 숨을 내쉬어 보았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상주는 둘이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중년 남성과 헐렁한 상복을 입은 남학생, 그리고,
분향소에 들어서자 여인 하나가 더 있었다. 파티션에 반쯤 가려져 있어 얼굴 전체를 볼 수는 없었지만, L은 단번에 그녀가 하란의 어머니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정 사진은 로비에서 본 것과 같았고, 왼편에는 근조기가, 위패 아래에는 성경책이 놓여 있었다. L은 그 성경을 보는 순간 문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 걸 근정이 모를 리 없는데, 왜 하란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말해주지 않았을까. 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하란은 ‘죽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게 완벽한 짝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하란과는 종교뿐 아니라 나이차, 교양 수준, 미적 취향, 패션, 시와 소설, 음식, 심지어 성적 취향까지도 맞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애당초 그런 짝과 실제로 만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므로, 지금 하란은 죽어 있는 것이다.
근정을 따라가 앉은 자리는 ○○중 교원들이 모여 있던 자리였다. ○○중에 재직하던 당시 상조회 총무를 맡았던 근정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L은 오가는 말들로 보아 그들의 직위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요컨대 교장, 교감, 교무부장쯤 되는 이들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L과 근정을 챙기는 말들이 연이어 쏟아졌다. “B 쌤! 죄송한데 여기 두 분 것 좀 부탁해요,”라고 말한 건 ○○중의 교감이었다. 도우미도 있는데 왜…, L은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B를 바라보았다. 제법 떨어진 자리였지만 그녀의 퀭한 안색은 분명히 느껴졌다. 오가는 대화 속에서 L은 그녀가 하란과 꽤 가까운 사이, 그러니까 절친한 동료였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L은 ○○중의 얼추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 어딘가 은은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학생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의아한 마음이 들어,
“애들이 없네요.” 하고 나직이 묻자,
“뭐, 막았겠지.” 짧은 답이 돌아왔다. 그 후 얼마쯤이 지났을까. B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밥그릇과 국그릇을 비롯한 일회용 용기들에는 모두 [○○광역시교육청 상조회]라는 로고가 박혀 있었다. 한편, L의 휴대폰에서는 이따금 짧은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진동은 규칙적이지 않지만 짧은 간격으로 오래도록 이어졌고, 그것이 수어 수업 수강생들의 메시지라는 걸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L은 그들 중 다수가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의 얘기 중에 ‘어떤 정보’가 생략된 것 같다는 느낌…. 그리고 그건 하란이 ‘좋지 않은 상황’ 가운데 불운을 겪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렴 그래도 그렇지 혼자 여행이 뭐야. 허구한 날 둘이 잘도 붙어 다니더만. 이럴 땐 또….” 하고 말한 건 교무부장이었다.
여기서의 둘이란, 하란과 B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난 김 선생이 술 먹는 걸 본 일이 없는데.” 하고 말한 건 교장이었고,
“이래저래 응분이나 풀 겸 채비를 했겠지요.” 하고 말한 건 교감이었다.
직전까지 경청을 이어가던 근정이,
“요새는 혼자서도 많이들 다닌다고 하더라구요. 아마 말씀대로 기분전환이나 할 겸 갔겠지요.” 말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꾸를 안 했다.
L은 건너편에 앉은 교장과 교감의 얼굴을 바라보며, 딱 십 분만 머무르다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그 사이, 네 명이 자리를 떴고, 새로운 세 여인이 그 자리를 채웠다. 각각 20대, 30대, 40대쯤으로 보이는 그들은 하란이 소속되어 있던 3학년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이전의 조문객들과는 달리 교장과 교감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배타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들끼리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L은 자연스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때, 50대로 보이는 여인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있잖아, 완전히 정리를, 정리가 된 거지?”
“그야 모르지, 않나요?” 답한 건 30대 여인이었고,
“제가요, 둘이 얘기하는 걸 잠깐 들었거든요, 두어 달 쯤 됐으려나.” 하고 입을 뗀 건 20대 여인이었다.
“쭉 만나긴 했나 봐요. 안 좋게 헤어진 건 아닌 것 같고. 저야 모르기는 한데, 여하간 그쯤일 거예요. 아마… 완전히 정리를 하기로, 서로 얘기 같은 게 오갔나 봐요.”
“응? 쭈욱?” 50대 여인이 물었다.
그러곤 정적이 흘렀다. 더 많은 추측이 이어질 줄 알았지만, 대화는 금세 다른 이야기로 옮겨갔다. L은 방금 전의 말을 곱씹었다. 아마, 완전히 정리를 하기로, 그런 이야기가 오갔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아마 그 연유로 하란은 근정이 제안한 소개팅을 받아들인 것이고, 그 후 어느 시점엔가 홀로 여행을 떠났으며, 종국에는 (그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끔찍한 행동을 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생각이 L의 머릿속을 강박처럼 맴돌았다.
L은 근정에게 인사를 건네고 빈소를 빠져나왔다.
휴대폰을 보니 76이 보였다. 단체채팅방의 메시지 수였다. 대화의 내용은 서너 번의 동작으로도 일별할 수 있었다. 포문을 연 이는 J와 K였고, 주도적으로 이끈 이는 나영이었다. 처음의 화두는 ‘그리움’이었다. 벌써 한 주가 지났다. S는 시험 준비를 잘하고 있나요. 푸념과 더불어 2차시 수강 여부에 관한 얘기가 이어졌다. 이어 ‘오프라인 모임’이 화두로 떠올랐다. 어째서인지 그 후로는 대화의 진행이 더디게 흘렀다. 서로 변죽만 울릴 뿐 확실한 결정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기까지 훑어 내린 후, L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길 건너 광장 너머로는 빠르게 지나가는 빛줄기들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횡단보도에 이른 L은, 짐짓 뒤를 돌아 장례식장을 바라보았다. 건물을 에워싼 희미한 빛무리를 바라보며 L은 생각했다. 아까, 하란의 처지를 두고 ‘여럿인 값’이라고 말한 이는 누구였을까. 속삭이듯 낮게 말했던 그 목소리는 누구의 것이었나. 20대 여인이었나, 경청하던 30대 여인이었나. 아니면… 나였나? 확실한 건, 그 말이 미끄덩 나왔다는 사실뿐이다. 어망을 빠져나온 물고기처럼, ‘여럿인 값’은 제멋대로 튀어나와 테이블을 넘고, 내키는 대로 장내를 휘저었다. L이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한 건 아마도 그쯤이었을 것이다. ‘여럿인 값’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강박처럼 맴돌던 그때. 물론 알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단순한 뉘앙스의 착각이거나, 자의적인 곡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날을 떠올렸다.
수어 수업 쫑파티가 있던 날이었다. 멤버는 총 일곱 명. 나영은 L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그녀의 왼편에는 K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회복지학 전공자인 K는 수강생들 중 가장 참여도가 높은 인물로, 첫 수업 이후로 줄곧 나영과 단짝처럼 지내왔다. L은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묵묵히 갈비를 굽고 있었다. 잘 익은 갈비만을 골라 차곡차곡 쌓아 두던 그때, 돌연 K가 나영의 결혼식을 화두에 올렸다. 그러자 나영은 짐짓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니, 절대로.”란 말을 연신 써가면서,
아니, 거리도 멀고 하니―예식장은 그곳에서 대중교통으로 2시간쯤 걸리는 거리라고 했다―다들 결혼식장에는 절대, 절대로 오시지들 말고 마음으로만 축하해주시라며 손사래를 쳤고,
자못 감상에 젖은 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저, 그것 하곤 전혀 상관없이 여러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니까, 뭐냐면요… 전부터 쭈욱 생각했던 건데, 그니까….”
“뭔데요 언니,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K가 부추기듯 말했다.
“여러분. 저 여러분을 꼭 집들이에 초대하고 싶어요. 나, 이 모임, 이 멤버가 너무 좋아. 이 인연을 오래오래 이어가고 싶어요. 정말 결혼식에는 안 와도 괜찮거든요. 정말, 정말로요. 그것 하곤 상관없이 집들이에는 꼭들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신혼여행 다녀오면 정식으로 초대할게요.”
L은 하마터면 코웃음을 칠 뻔했다. 가까스로 소리를 삼켜냈을 만큼. ‘저게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영은 결혼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L은 잠시 상상해 보았다. 나영의 신혼집에서, 나영과 그녀의 신랑, 그리고 수강생들과 함께 둘러앉아 수다를 나누는 장면을. 그저 상상일 뿐인데도 아찔한 기분이 밀려왔다. K는 “당연하죠, 언니,”라며 기대에 찬 얼굴로 응수했다. 누군가는 손뼉을 쳤고, 환호성을 지르는 이도 있었지만, L을 포함한 몇몇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L은 그 고개 끄덕임 속에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나영은, 무언가, 쉽게 생각하고 있다.
쉽게 발상하고, 쉽게 얻으려 한다.
빈소에서 나와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L은 내내 그런 생각에 잠겨있었다.
횡단보도 앞. 적색등이 켜지자, 차들이 휙휙 눈앞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L은 다시 한 번 단체 채팅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자 한 자, 신중히 문장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전송’을 눌렀다.
십 분쯤이 지나자 진동이 울려왔다.
거기에는 달랑 이모티콘 하나뿐인 답도, ㅠ를 일고여덟 개씩 써가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답도, 더러는 넌지시 불참 의사를 내비치는 답도 있었지만, 직전까지 대화를 주도하던 B와 나영만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시발, 그럼 그렇지.
L은 거기까지 읽어내린 뒤,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 후 채팅방은 한동안, 전례 없던 침묵을 이어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