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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위를 걷는 여름의 유희 !

스타카토와 레카토의 랑데뷰

by 월하시정

여름은 피아노 뚜껑 위에 살짝 내려앉는 햇살처럼 은은히 시작되었다.

뜨거운 빛이 흰 건반 위에 쏟아져, 손끝이 닿을 때마다 살짝 따끔한 열기를 전했다.

나는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이 길게 이어져, 마치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한낮의 뜨거운 산책로 같았다.

손가락이 내려갈 때마다 맑은 소리들이 방 안에 살며시 퍼져 나갔다.

그 소리들은 마치 개울물처럼 투명하게 흘러, 여름 공기를 가르며 무심히 떠다니는 먼지 입자들까지도 잠시 멈추게 했다.

건반 위의 아침
흰 이슬이 녹아내리는 아침,
검은 열쇠 위로 손가락이 걷는다.

하나의 음이 깨어나고,
햇살 속에 맑은 강물이 흐르네.

창밖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푸른 바람,
그 속에 음표들이 살며시 춤추고,
하루가 이슬 맺히듯 새롭게 열리네.


​나는 건반 사이로 흐르는 시간을 느꼈다. 가벼운 스타카토는 마치 뜨거운 돌 위를 재빠르게 건너뛰는 발걸음 같았고, 길게 이어지는 레가토 선율은 무더위 속에 스민 그윽한 그늘처럼 느껴졌다.

손가락 끝에서 울려 퍼지는 각 음들은 저마다 고유한 색채를 지녔다.
높고 맑은 소리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빛을 닮았고, 깊고 무거운 저음은 뜨거운 땅의 숨결을 담고 있었다.

그 소리들은 서로 어우러지며,
내 안에 잠자던 무수한 감각들을 깨웠다.

마치 오래된 피아노 뚜껑을 열었을 때, 먼지 사이로 비추는 햇살 속에서 오래된 기억의 빛이 반짝이는 것처럼.

피아노 앞에 앉아 있노라면, 시간은 마치 페달을 밟은 채 길게 이어지는 화음처럼 느껴졌다.

끊임없이 흐르면서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때로는 손가락이 건반 위를 스치며 내는 가벼운 트릴이, 뜨거운 오후 창가에 앉아 바라본 잠들지 않은 나뭇잎들의 미세한 떨림과 겹쳐졌다.

그 작은 떨림 속에 여름 생명의 숨소리가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건반 위를 걷는 나의 손가락은 마치 뜨거운 대지 위를 조심스레 디디는 발자국이었다.

한 걸음마다 고요한 울림이 일고,
그 소리는 내 안의 여름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여름밤의 음율
별빛이 스며드는 저녁,
검은 열쇠 위로 그림자가 걷는다.

음 하나가 별을 켜고,
고요 속에 밤의 노래가 흐르네.

열매 익는 소리, 반짝이는 달빛,
고요한 밤의 심장에 맥박이 뛰고,
어둠 속 별들이 건반 위로 스며들어
꿈의 선율을 써 내려가네.
월하시정

해가 서산으로 기울며, 건반 위에 놓여 있던 뜨거운 빛은 차츰 사그라지고,
대신 창문으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황혼빛이 그 자리를 채웠다.


흰 건반들이 차갑게 식어갔다. 낮의 생생한 소리들은 이제 부드러운 저녁의 화음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피아노의 잔향과 섞여 밤의 서곡을 만들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건반 위를 걷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더욱 선명해졌다.

각 건반은 하나의 작은 섬이 되어, 내가 건너는 소리의 다리가 되어주었다. 그 위를 걸을 때마다 어둠 속에 새로운 별이 하나씩 켜지는 것 같았다.

피아노는 고요 속에서도 내부에서 끊임없이 울림을 간직한 채 서 있다. 여름의 뜨거운 숨결이 건반 틈새로 스며들 때마다,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소리들이 살아 움직일 준비를 한다.

건반 위를 걷는 일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이는 내가 시간의 물결 위에 살며시 새기는 서정의 발자취.

손가락이 만지는 열쇠 하나하나가, 뜨거운 계절의 맥박과 내 마음속 깊은 울림을 이어주는 작은 통로이다.

여름은 피아노 속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난다.

햇살의 무게가 건반을 눌렀다가 저녁이슬이 그 열기를 식히는 순간마다, 내 안의 무수한 여름들이 소리로 깨어나 건반 위를 거닐고 있다.

그 유희는 끝나지 않는다.

뜨거운 계절의 심장이 뛰는 한, 건반 위를 걷는 발자국 소리는 계속해서 고요한 밤을 가르고, 새로운 아침을 불러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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