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목에 부는 계절의 바람!
여울목은 강물이 돌아서는 곳이다.
물살이 부딪히고, 휘감기고,
다시 흘러가는 그곳은
시간이 고여 있다가
새롭게 태어나는 자리다.
계절은 이 여울목을 스쳐 지나며
봄의 부드러움,
여름의 열기,
가을의 숙성,
겨울의 침잠을 고스란히 남긴다.
이곳에서
나는 계절의 숨소리를 듣는다.
물결이 돌아가는 소리,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
눈꽃이 녹는 소리까지.
모든 것은 순환하되,
결코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여울목은 그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인생의 무상을,
그러나 동시에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흐르는 물은 돌이킬 수 없건만
달빛은 어제와 같구나"
황진이, 시조 중에서
계절적 아름다움 :
시간의 색채를 담는 그릇
봄의 여울목은 눈물처럼 맑다.
얼음이 갈라지며 내뿜는 첫 물소리는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종소리다.
버들가지가 물 위를 스칠 때면,
강바닥에 잠든 모든 것이 깨어난다.
여름은
푸른 열기로 물을 가득 채운다.
수련이 피어나고,
잠자리가 날개를 덮은
물결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을은
강물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흐른다.
떨어지는 낙엽이 강 위에 편지를 쓸 때, 여울목은 그 글자를 읽고는
조용히 웃는다.
겨울이 오면 강은 침묵한다.
얼음 아래에서도 물은 흐르지만,
그 소리는 땅속 깊이 스며들어
겨울잠을 재촉한다.
계절은
여울목에 각기 다른 얼굴을 남기지만,
그 아름다움은 결국 ‘흐름’이라는
한 가지 진리로 수렴된다.
봄의 신록이 가을의 단풍이 되듯,
모든 아름다움은 변하기에 아름답다.
겨울을 지나온 인고의 계절 :
얼음 아래의 뿌리
겨울은
여울목에게 단단한 시련이다.
강물은 얼어붙고,
생명의 소리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 침묵은 죽음이 아니다.
겨울은 뿌리를 키우는 계절이다.
얼음 아래에서도 물은 흐르고,
버드나무는 땅속으로 힘을
모은다.
"한파에 흔들리는 갈대여
뿌리 깊은 줄을 모르리라"
미상, "설중매"중에서
인생도 그러하다.
추위에 떨며 하늘을 우러를 때,
우리는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게 된다.
겨울은
외로움과 고독을 배우는 시간.
여울목의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는
마치 영혼의 균열처럼 아프지만,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빛은 더욱 찬란하다.
봄이 오기 전,
겨울은 반드시 지나가야 할 통로다.
인생무상 :
물거품 같은 순간들을 안고
여울목의 물결은 쉼 없이 흐르지만,
그 모양은 한순간도 같지 않다.
아침에 비친 달빛은 저녁이 되면
해질녘 노을에 묻힌다.
강가에 핀 꽃은
며칠 안 되어 떠내려가고,
어제의 물소리는
오늘 이미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인생이 백 년이라니
꿈속의 꿈이로다"
정철, "관동별곡" 중
우리의 삶도 여울목의 물거품과 같다.
탄생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물결처럼 밀려오지만,
결국 모두 강물에 섞여 흐른다.
그러나
무상함이 허무함만은 아니다.
오히려 덧없기 때문에 소중하다.
떠내려가는 낙엽도,
스쳐 간 바람도,
그 순간만큼 온전히 현재에 머문다.
일상의 행복 :
여울목에 비친 작은 기적
행복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여울목에 비친 수많은 조각들이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거미줄,
낚시꾼의 품에 맴도는 잉어 한 마리,
해 질 녘 강가에 앉아 흩날리는
모래를 쥐었다 푸는 손길.
이 모든 것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삶의 근원이다.
어느 가을날,
나는 여울목에 앉아 떠내려오는
은행잎을 주웠다.
그 잎사귀의 무늬는
마치 강물의 흐름을 닮았고,
손바닥 위에서 스치는
바람은 시간의 손길이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행복은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줄 아는 것’임을.
옛 시인의 눈물과 노래 :
시조와 한시로 엮는 계절
조선의 선비들은 여울목을 지나며
인생을 노래했다.
그들의 시선은 강물과 하나 되어 흘러갔다.
"강상에서 맑은 달을 바라보니
천 년의 슬픔이 한데 어리네"
이백,"월하독작" 중에서
또한, 고려의 승려들은
겨울 강가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눈 덮인 강에 배 한 척 없는데
홀로 앉아 세상의 뜨락을 보네"
지눌, "설중한담" 중
이 시들에는
계절을 초월한 통찰이 담겼다.
달빛도, 눈보라도,
결국
마음의 거울에 비친 그림자일 뿐임을.
마침 : 돌고 도는 물결 속에서
여울목은
오늘도 계절을 돌려보낸다.
나는 이제 그 물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인생이란
결국 여울목의 물결과 같아서,
때로는 거칠게 부딪히고 때로는
잔잔히 스쳐가지만,
그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봄꽃처럼 피어났다 가을바람처럼 사라지는 순간을 안고,
오늘을 살아간다.
눈을 감으면 여울목 물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과거의 흔적이자 미래의 약속이며,
지금 이 순간의 전부다.
"흐르는 물에 발 담그니
영원이 내 발끝에 서 있고
피는 꽃잎 그대의 우주
잘 물든 낙엽은 나그네 인생이었네"
월하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