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는 시간을 마시고 물소리는 시를 짓노니 ...
물과 산이 빚은 시공간
울주군 교동리의 깊은 산속,
작천정(酌川亭)은 조선 선비들이
산수를 벗 삼아 시를 읊던 공간이다.
여기서 발을 돌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작괘천(酌掛川)이 흐른다.
이름부터가 시적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장맛비가 지루한데 산의 풍광은 창호에 들어와 옷깃에 가득하네
신선을 찾아 어찌 반드시
방외에서 노닐겠는가
하늘은 이 정자에
학과 거문고를 빌려주었네
- 작천정 내부 이호경의 현판시-
작 괘 천
"술잔을 걸어둔 계곡"이라니, 선인들은 이 물길을 술잔처럼 여기며 자연과의 취흥을 나누었을 것이다.
어느 작가에 따르면, 이곳은
"산이 잔이 되고 물이 술이 되어
시간을 마시는 장소"라 한다.
역사의 숨결이 고인 자락을 걸으며, 나는 문득 내고향 수남의 작천정과 작괘천에 스민 시조와 한시의 흔적을 찾아 상차림을 해보고자 한다.
굽이굽이 맑은 물 동북으로흐르고
첩첩바위는 눈처럼 하얗게 깔였네
사람이 오면 마치 그림속으로 들어간 듯
만발한 꽃이 맑은 물에 붉게 비추네
조물주는 누굴위해 아름다운 곳 만들었나
시내물은 밤낮없이 산 아래로 흘러가네
신선이 이곳 따라
시원한 바람타고 노니
길은 장차 천상과 이어지네
권해 작괘천
하얀 바위에는 글자를 새기고
맑은 물에는 갓끈을 빨겠네
어찌 이곳에 초가집 엮어
은거하여 남은 생을 보내지 않으리오
박 민효 작쾌천 반석
바위의 뼈는 천년의 고요이고
물결의 마음은 만고의 흐름이라
느릿느릿 그렇게 흐르는 고요한 곳에
신기를 찾을 필요가 없네
윤 세용 작괘천
무지개 물살아래 술잔을 걸어두고
떠나간 신선은 다시 돌이오지 않으니
느긋하게 바위에 올리서서 때때로
흰구름 흘러가는 것을 보리라
오 병선 작괘천
작천정은 포은 정 몽주가
책을 읽은 장소라고 전해진다.
작천정 :
돌아온 달빛 아래 선 시의 정자
**역사의 숨결**
작천정은 1563년 박명원이 건립한 정자로, 퇴계 이황이
"山是螺盃水是盃"
(산은 나전잔이요 물은 술잔이라)"라
노래한 곳이다.
계곡을 마주한 팔각지붕 아래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혹자는 이곳을 "달이 흘러내리는 정자"라 표현했는데, 밤이면 기둥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이 마치 옛 선비들의 시선처럼 고요히 내려앉는다.
정자에는 현재 19개 현판이 걸려있고
한시에 관한 현판이 18개다.
모두 작천정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묘사하고 선경에 온 듯하다는 신선한 느낌과 감정을 강조하면서 표현하고 있다.
풍월을 읊조림에 한가한 날이 없는데
정자는 시 짓는 선비를 위한 다락이네.
이름을 쓴 바위는 이미 오래되었고 술잔을
가득 채운 물은 소용돌이치며 흐르네
사람은 별세계를 찾는데
산은 예 세월을 품고 있네
난간에 기대어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으니
소리마다 고국을 떠난 시름이네”
오 병선
* 작천정에 밤이 오니 *
달빛이 기둥에 걸리니
산 그림자 술잔 되어 흔들리고
어디선가 슬피 부는 적벽노래
취한 듯 정자 기울어 잠든다
아득히 옛 시인들 손끝에서
한 줄기 물소리로 피어오르네
월하시정
돌아온 계절
가을 단풍이 정자에 앉아
붉은 술잔 돌리면
읊조리던 퇴계의 글씨는 바람에 젖어
계곡에 번지고
나무 그늘에 기대어 눈 감으면
천년 전 목소리 물길에 흐르네
월하시정
작괘천 :
물소리에 새긴 시의 맥박은
흐르는 시의 강이 된다
작괘천은 작천정 아래로 이어지는 계곡이다. 여름에는 맑은 물이 돌틈을 뚫고 흐르고, 가을에는 단풍잎이 수면에 떠 내려가며 시 한편을 쓴다.
문인들은 이 물길을
"시인들이 걸어놓은 물주머니"라 했다.
과거 선비들이 이곳에서
시회를 열며 술잔을 띄웠듯,
오늘도 물속에는 하늘과 산이 잔처럼 담긴다.
* 작괘천에 부치는 편지
물결이 돌을 두드리니
옛 시절 종이 위에
글자 되어 흩어지고
푸른 이끼 묻은 바위엔
취한 달빛이 기대어 잠든다
흐르는 강물에 손을 적시면
천년의 술잔이 내 손에 오네
월하시정
물의 노래
계곡물은 하늘을 태워
푸른 불꽃 되어 흐르고
돌과 나무는 그 물결에
옛 시절의 운율을 묻는다
저녁 노을 작괘천에 스며들면
온 세상이 시 한 편이 되네
어릴적에는 각자된 선홍색 이름이
바위와 자갈보다 많았다는
어른들이 설이 허풍만은 아닌 듯했다.
답사기 : 시와 역사가 흐르는 길
아침 : 작천정에서 맞이하는 새벽
새벽 안개가 계곡을 적시는 시간.
정자에 오르니 돌계단이 차갑다.
퇴계가 남긴 현판
"山是螺盃水是盃"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빛난다.
*酌川亭*
山是螺盃水是盃
更煩絲竹助歡咍
風流太守尋常事
不是山陰故事來
"산은 나전잔이요 물은 술잔이라
거기에 더하여 생황과 비파로 즐거움을 돋우네
풍류아는 태수는 흔한 일이지만
이는 산음(왕희지의 난정)의
옛일을 따름이 아니로다"
문인은 이 풍경을
"한시가 안개로 번져 내리는 순간"이라 기록했다.
한여름 소낙비나 얕은 장마후에는
작괘천이 자동으로 정화되니,
너럭바위 패인 구덩이에 술과 표주박을 띄우고 집안 친인척들이
피접을 옆집나들이 하듯 들렀건만.
(패인 구덩이는 자수정이 빠져나간 자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작괘천은
은빛 실타래처럼 구불거린다.
마치 조선 시대 선비들이 띄운
시선이 흘러내리는 듯하다.
낮:
작괘천을 따라 걷는 시의 길
계곡을 따라 내려가며 발걸음에 맞춰
물소리가 변주된다.
여기서는 물이 시의 리듬이 된다.
작괘천의 물소리는 꽃이되고
수백년된 아름드리 벗나무가
순삭의 꽃잎을 터뜨리고,
만산홍옆 나뭇잎과 바위의 붉디붉은
옛 묵객의 각자된 이름들이 함께 물들때면, 작괘천 너럭바위에는 거문고 소리와
기녀의 춤사위로 하늘을 수놓았으리라.
아마도 먹갈고 붓질하기도 바쁜 모습이 상상되어 더욱 시가와 시정을 느끼게한다.
폭포에서는 격정적인 장단이,
잔잔한 여울에서는 평안한 율조가 흐른다.
계곡바위에 앉아 허공에
시 한 수를 읊조리니,
문득 김삿갓이 이곳에서 남긴 시구가 떠오른다.
물은 잔이 되어 흐르니
산은 취해 흔들리는구나
저녁 :
돌아오는 길에 스민 생각
해질 녘, 작천정의 기둥 그림자가
계곡을 가로지른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시(詩)가 산(山)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마치
한 편의 시조를 읽는 것과 같았다.
역사의 시인들이 남긴 흔적과
오늘의 내 발자국이 중첩되는 순간,
문득 생각나 읊어본다.
*작괘천 맑은 물
검은 이끼 덮인 적벽 붉은 그 이름
칠순노옹 백발 되어 물결에게 되묻노라니
강산 옛 모습 어디로 흘러가고
흐르는 세월만 작괘천에 노랠하나
돌아선 나그네에 월색이 마중하니
눈물 겨운 하늘에 작천정이 붓을 드네
---
바람은 옛 노랜데
바위엔 글씨 흐려
백발을 날려가며
추억을 잔에 담네
이끼 속 붉은 빛
영롱히 스며드니
한 줄기 햇강물되어
내 심장 뛰게하누나
월하시정
작천정과 작괘천은 시공을 초월해 시(詩)로 호흡하는 살아있는 유산임을.
에필로그 :
시가 흐르는 땅, 울주 교동의 영혼
작천정과 작괘천은 단순한 경관이 아니다.
**자연과 인문이 하나 되어
시(詩)로 승화된 공간**
퇴계의 한시부터 김삿갓의 풍류까지,
수백 년을 걸려 켜켜이 쌓인 문학적 층위가 오늘날 답사자의 가슴에 와닿는다.
옛문인과 시인들이 강조하듯,
이곳을 찾는 이들은
"물소리를 시로, 바람소리를 노래"
로 담아 가야 한다.
한여름의 푸르름, 가을의 적색,
겨울의 고요함이 각기 다른 시적 화음을 내는
이 장소는 영원히 문학의 샘으로 남을 것이다.
작천정에 부치다
청산이 옛 맹세 잊지 않으니
흐르는 계곡물 소리 설법일세.
안개 서린 난간에 걸린 달빛은
고요히 앉아 옛 경전을 펼치네.
한 줄기 작괘천 천 년을 흘러
무상(無常)의 노래 잔잔히 전하니
돌 위에 핀 들꽃 선약(禪樂) 되고
천리타향 흰 서리 고향에 내리니
머무는 발길에 마음이 열리네.
늦은 밤 솔바람 은은히 스며들고
작천정 깊은 숨결로 잠기었도다.
부도(浮屠)의 그림자 달빛에 젖어
허공에 새긴 글자 빛나누나.
절간 스님 발자국 먼지 잠잠하니
이 길은 부처님 오신 길이라.
한 점 구름이 사그라지는 곳에
영원한 봄빛이 피어오르리.
월하시정
---
**작천정의 건립 배경**
1563년 박명원이 학문과
휴식을 겸한 공간으로 조성.
*퇴계 이황의 방문*
16세기 중반, 울산 유람 시기 작천정에서
시회를 열며 한시를 남김.
*작괘천의 이름 유래*
계곡물이 마치 술잔을 걸어둔
듯한 지형에서 비롯됨.
"산은 시(詩)요 물은 노래라
이곳에 서면 천년의 술 잔이 되돌아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