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0년 12월 15일에 합천 황매산 자락 복치동에서 3남 5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첫째가 형님이고 그다음으로 다섯 분의 누님이 있으며 내 아래 남동생이 한 명 있다. 8남매에 부모님을 합해서 10명이라는 대가족이었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까지 논이 두 마지기에 불과했기에 먹고 실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이산 저산 너머에 밭뙈기가 몇 개 있어 여름에는 감자, 겨울이면 고구마로 점심 끼니를 때울 수가 있었다. 가난한 살림에 자식들에게 배를 곯지 않게 하려고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얼마 되지 않는 그 논도 동네에서 산을 넘어서 원골마을 뒤 안원골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가을이면 볏단을 묶은 후 동네까지 지고 와서 탈곡했다. 그곳에서 탈곡하더라도 짚을 집으로 지고 와야 하거니와, 남의 공상(탈곡기)을 긴 시간 빌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때 어린 나도 동생과 10단 정도의 볏단을 새끼로 묶어 집에까지 지고 오곤 했는데 중간에 쉬는 자리에 나락 이삭이 몇 개라도 떨어지면 아버지로부터 혼이 나곤 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는 날은 1년 중에서 단 한 번 쌀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는데, 보리쌀이 들어가지 않은 새하얀 쌀밥에 맨 간장을 한 술 떠 넣어서 먹었던 고소한 그 맛은 6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집은 동네 한가운데 기와집으로 살밖을 나가면 길가에 우거진 대나무 숲이 있었고, 그 옆에 마을 공동 샘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를 큰 새미라고 불렀다. 길에서 두세 계단 아래로 움푹 들어간 대여섯 평 남짓할 정도의 새미 가에는 커다란 탱자나무가 한 그루 드리워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솟아나는 샘에는 지름 1.5 미터 정도의 도깡으로 물을 담는 우물이 있었다. 이 샘 주변으로 빨래나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시멘트로 덮여 있었고, 우물에서 넘친 물은 골을 따라 도랑으로 졸졸 흘러 들어갔다. 이 우물은 추운 겨울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따뜻했고 여름이면 시원하여 수박을 띄어놓으면 냉장고 역할을 했다.
새마을운동으로 마을 길이 정비되기 전까지는 우물 앞의 도랑에 빨래터도 있었는데 그 당시는 어디서 그렇게 물이 많이 흘러 내려왔는지 의문이다.
내가 어릴 때 우리 동네는 약 30 가구에 육박할 정도였고 집집마다 가족이 예닐곱 명이 넘었으니 인구수가 꽤 많았다. 특히 베이비붐 시대로 동네 어른들도 대개 젊었고 집집마다 온통 어린애들로 가득해 늘 동네가 분주하고 역동적이었다. 조그마한 동네에 초등학교의 같은 학년 친구가 13명이나 되었고, 아기를 낳아서 외부인의 출입을 삼가는 금기줄 쳐진 집이 년 중 끊어지지 않았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 황매산 자락에는 겨울이면 무척 춥고 눈이 많이 왔다. 겨울이면 얼음이 깡깡 언 논이나 저수지에서 스케토를 타고, 눈사람도 만들고 친구들과 눈싸움도 많이 했다. 따뜻하게 입을 옷이 제대로 없었던 시절로 어쩌다가 잠바나 벙어리장갑이라도 얻어걸리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갈아입을 옷이 제대로 없던 시절이라 어린애들이 옷을 입은 채로 용변을 바로 볼 수 있도록 가랑이가 없는 내복 바지를 입고 다녔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지금과 달리 문명의 이기가 없었기에 자연에서 온갖 놀이기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나무로 팽이를 다듬어 팽이 싸움도 하고, 나무 막대기를 뾰족하게 깎아서 못꽂기를 하면서 서로 따먹기도 하고, 딱지치기, 자치기(마떼) 놀이, 땅따먹기, 마루놀이, 연날리기 등 놀이의 종류가 수도 없이 많았다.
자치기를 할 때 받아가기가 있었다. 이는 공중에 뜬 마떼를 받아서 도망가면 수비가 그를 잡아야 하는데 잡히기 전에 마떼를 던지면 그동안 달릴 거리를 자로 재어야 했다. 이때 마떼를 들고 도망갔던 사람이 어림의 자수를 부르는데, 수비가 동의하면 그대로 이어지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직접 재어야 했다. 그런데 동네 몇 바퀴를 자로 재려면 종일이 걸리는 일이었다. 이때는 수 십자의 길이를 잰 긴 새끼를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했는데 이는 산수 공부에도 도움이 되었다.
굴렁쇠 굴리기도 참 재미있는 놀이였다. 양철로 된 물동이의 바닥을 고정하는 굴렁쇠는 아무나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집에서 버리는 양동이가 있으면 굴렁쇠를 빼어서 철사로 만든 손잡이로 굴리며 달리는데 그 손맛이 꽤 좋았다.
가끔 면소재지의 엿장수가 엿판을 지고 오면 동네 아이들에게는 큰 잔칫날이 된다. 찰깍찰깍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은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엿을 바꿔먹을 것들을 찾는다. 방안의 기둥 사이에 꽂아놓은 어머니의 머리카락은 엿을 바꿔먹기에 가장 흔하고 좋은 재료이다. 어머니가 참빗으로 머리를 빗을 때 빠진 머리카락을 말아서 기둥 사이에 끼워놓으신 것이다. 쇳조각이나 비료 포대로도 엿을 준다. 돼지 털이나 가지런하게 잘라 놓은 어머니의 머리카락은 비싸게 쳐주기에 비누와 바꿀 수가 있었다. 이는 모두 개발 도상 국가였던 우리나라에서 가발을 만들어 수출하는 재료였다.
가끔 집에 쟁기 보습이나 조선낫을 찾다가 못 찾는 날이면 아버지께서 나와 동생에게 엿을 바꿔 먹었다며 혼을 내실 때는 정말 억울했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
나는 어릴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우리 집에 소가 없어서 논을 갈 때는 남의 소를 빌려와야 했는데 이는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소 좀 빌려 달라고 하시던데요~~” 그 말이 그렇게 싫었다. 어쩌면 어른들도 남의 것을 빌리는 것이 싫으니 애들을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남의 소를 반양 먹인 후부터 우리 집에도 소가 생겼다. 남의 집 송아지를 데리고 와서 어미 소가 될 때까지 길러주고 그놈이 낳은 새끼를 우리가 갖게 된 것이다. 그 후부터 우리도 한 번씩 송아지를 팔아서 돈을 만들 수가 있었다.
“너희들은 소 덕택에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라.” 언젠가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 8남매 중에서 나보다 열다섯 살 위의 형님은 중학교를 마칠 수 있었으나 다섯 명의 누나는 경제 사정으로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그 시대 대부분이 그랬었지만 참으로 미안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나와 동생은 다행히 송아지 덕분에 정규교육을 모두 마칠 수가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이 우리에게는 ‘우골탑’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까마득한 그 시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 같지만 당시는 모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속에서도 행복감을 느끼며 살았었다. 오히려 어려웠던 그 시절이 지금은 추억으로 변하여 나의 인생을 풍성하게 해 준다는 생각에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