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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호랑이

by 윤병우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서운 아버지이다. 나의 아버지는 나보다 키가 더 컸고 골격이 튼튼했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표정에서부터 카리스마를 느낄 정도로 잘 생기셨었다. 그리하여 눈을 크게 부릅뜨기만 해도 아이들뿐만 아니라 동네 어른들도 위압감을 느끼곤 했다.

“예전에 영암사 목조건물을 건축할 때 덕촌의 어느 부잣집 행랑채를 옮겨서 지었는데 그 대들보를 질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지고 옮겼다.” 힘이 장사였던 아버지가 생전에 하신 말씀이다.

“비슷한 나이로 목침 빼앗기를 하면 우리 면에서 나를 이길 사람은 없을 거야.” 그 당시 어른들은 팔씨름하듯이 손아귀 힘으로 양쪽에서 목침 빼앗는 게임을 하셨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고 엄마에게 지나치게 엄하셨다. 가난한 처지에서 처가 동네에서 8남매의 자식을 기르면서 자존심을 지키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부분도 있겠지만 그래도 정도가 심하셨다.

그 시절 어른들이 대체로 가부장적인 경향이 있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중에서도 정도가 심하셨기에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는 자신이 정해놓은 틀에서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용납하지 않으셨다. 올망졸망 두 살 터울의 여덟 남매가 함께 자라다 보면 서로 싸우거나 울 수도 있는데 이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누군가 토라지거나 울고 있다가도 외출에서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인기척을 느끼는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온 가족이 제자리로 돌아가서 태연한 척 연기를 하곤 했었다.

외출하실 때도 당신께서 원하는 손수건을 찾지 못하고 다른 것을 전해드리면 어머니께 화를 내면서 찢어버리기도 하셨고, 어머니가 설거지하다가 접시 하나를 깨뜨리는 날이면 날벼락을 치셨다.

본인이 외출에서 아무리 밤늦게 돌아오시더라도 어머니가 잠들어 있으면 안 되었으니 이기적이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셨던 것 같다. 이는 막내로 태어나서 세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모성에 목말라 생긴 성격일 것 같기도 하다.

우리 8남매는 가난한 살림에서 아내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엄마 역할도 동시에 해야 했던 어머니의 혹독한 삶을 늘 가슴 아파하면서 살았고, 그런 아버지를 미워했다.


나의 정수리 오른쪽 모서리 머리카락을 들쳐 보면 커다란 흉터가 하나 있는데 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훨씬 전에 시냇물에 멱감으러 갔다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생긴 것이다.

우리 마을 시냇가에는 황매산 근처에서부터 시내를 따라 화강암 바위가 땅속을 드나들며 굽이쳐 수 킬로가 계속된다. 소(물웅덩이)를 만드는 곳에선 멱을 감았고, 얕게 물이 흐르는 매끈한 바위에서는 미끄럼을 타면서 놀았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는 여름이면 얕은 바위는 이끼로 매우 미끄러운데 어느 날 넷째 누나를 따라 멱을 감으러 갔다가 그곳에서 넘어져 정수리 오른쪽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펑펑 쏟아지는 피에 상처보다 더 큰 걱정은 아버지로부터 혼나는 것이었다. 누나는 옷감을 찢어서 나의 상처 부위에 동여매어 주고는 함께 멱을 감으러 갔다는 사실을 절대 비밀에 부쳐달라고 당부했다. 그런 후에 얼른 집으로 돌아가 빨랫감을 갖고 빨래터에 가서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그때 엄마가 얼마나 가슴을 조였으며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고는 한순간의 부주의로 일어나기에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가 없는 것인데도 그러지 못하시는 아버지가 늘 불만스러웠고 8남매의 심리적 공적公敵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1970년대 초반에 마을마다 애향단을 조직하고 마을 청소나 꽃동산 가꾸기 등을 시키고, 애향단 깃발을 앞세우고 줄을 서서 등교했던 적이 있다. 또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제식훈련을 시키고 마을별로 경연대회를 했는데, 밤이면 선배들이 동네 학생들을 마을 공터에 모아서 달빛 아래에서 연습을 시키고 어른들이 옆에 서서 구경을 하곤 했었다.

“앞으로 가, 좌향 앞으로 가, 우향 앞으로 가.”

그런데 나보다 한 학년 아래인 남동생이 ‘좌우’가 헷갈려서 자꾸 틀리자 옆에서 보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대열 속의 동생을 끌어내어 혼을 내던 일이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초등학교 때 동네에서 2킬로 정도 떨어진 두심이라는 곳에서 동네 뒤 당산까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를 개설하던 때의 일이다. 중장비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이라 이른 아침부터 동네 어른들이 모두 나가 괭이와 삽으로 흙과 돌멩이를 파서 리어카로 실어 나르며 도로를 만들다가 저녁녘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네 청년이 리어카를 끌고 내리막길을 내달리는데 거기에 매달렸던 동생이 리어카 바퀴살(스포크)에 발등을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동생은 아버지에게서 엄청 혼이 났다.

그 발이 다 나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이웃집 마당에서 친구들과 리어카를 타고 놀던 동생이 또다시 발을 다쳤는데 이는 가족 모두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아들이 다쳤으면 다독거리고 돌봐주는 것이 정상인데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사랑과 욕심이 뒤범벅되어 엉뚱한 방법으로 표출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8남매는 이런 아버지를 공포에 가까울 정도로 무서워했고 미워했다.

내가 아버지가 되어 두 명의 자식을 길러본 후에야 아버지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이 혼란을 일으키면서 그릇되게 표출된 것 같다. 조곤조곤 타이르면서 말로써 설득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보지만 나 역시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아버지를 탓할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이다.


어느덧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도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내가 어른이 되어 60대 중반을 훌쩍 넘기고 보니 그렇게도 싫었던 아버지가 한편으로는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8남매가 노인이 다된 지금까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끈끈한 우애로 인생을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이 호랑이같이 무서웠던 아버지의 덕택인 것 같다. 아버지가 가족들의 공적으로 악역을 맡으시면서, 동병상련의 자식들이 한 팀으로 똘똘 뭉치게 한 것이 아버지의 지혜였다고 자위하면서 그때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심연의 바다로 침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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