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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우 Mar 02. 2023

은사님을 기억하며

MBC 여성시대 손숙, 김승현입니다.

한 달 전쯤 친구 D로부터 그의 부친 유고집에 제자들의 글을  몇 편 고 싶다며  원고를 부탁했다. 그와 나는  동문 수학한 중학교 동기동창이고 그의 부친은 우리 선생님이셨다.

  원고를 약속한 날짜가 다가와 어떤 글을 쓸지 숙제하는 마음으로 선생님과 관련된 옛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26여 년 전의 일이다. 전자공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내가 근무하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주관으로 미국 퀄컴사의 CDMA 특허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삼성전자, LG전자 등과 함께 상용화한 후 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지 꼭 2년이 되는 1997년 2월 말경의 일이다.

  서른여섯 살의 파릇파릇 젊었던 그 시절, 꿈에 부푼 마음으로 출근을 하던 중 승용차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친구 D가 MBC 여성시대 프로그램에 자신의 부친인 김삼시 선생님에 관한 사연을 투고하여 진행자인 손숙‧김승현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중간부터 들어서 앞의 내용은 잘 모르지만 선생님께서 정년퇴직을 하시면서 훈장을 받으셨고, 오랜 교단생활로 인한 성대결절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소회를 감동적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나의 지인이 방송에 나온다는 것이 신기했고, 은사님에 대한 추억이 가슴에 솟구쳐 나도 모르게 휴대폰으로 서울 MBC 방송국에 전화를 해서 담당 PD와 통화를 했다.

  “조금 전의 방송 내용인 김삼시 선생님이 저의 은사님이시고 전화가 연결되었던 D 씨가 저의 친구입니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잠시 후 전화를 연결할 테니 전화번호를 말씀해 주세요.” 방송 중에 PD의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나는 그전에 부산 MBC 방송국에 잠시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 방송의 진행 및 제작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재빨리 차를 운전해서 학교 연구실에 도착하자 방송국에서 유선으로 전화가 왔다. 잠시 후 손숙‧김승현 씨가 호출하면 대화를 하라는 담당 PD의 안내와 함께 나의 전화로 실시간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 또 다른 청취자 한 분을 연결하겠습니다.” 김승현의 멘트와 함께 나의 전화가 방송으로 연결되었다. 두 진행자는 주거니 받거니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끌어갔다. 전화로 진행자 김승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내심 긴장되었다.

  “여보세요!” 진행자 두 사람이 동시에 ‘여보세요’를 외친다.

  “네, 안녕하세요 손숙 김승현 씨.” 나의 목소리도 라디오를 통해 들려온다.

  “어디 사는 누구세요?”

  “네, 저는 부산에 사는 윤병우입니다.”

  “윤병우 씨, 저희 여성시대 방송 자주 듣습니까?”

  “네, 출근하면서 자주 듣고 있습니다. 김승현 씨도 재치 있고, 손숙 씨도 목소리가 맑아서 너무 재미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하하하.” 목소리가 좋다는 말에 손숙 씨가 일부러 코맹맹이 소리로 아양을 떨었다.

  “아까 전화연결이 되었던 D라는 사람이 저의 친구이고, 김삼시 선생님이 저의 중학교 은사님이십니다.” PD에게 했던 것과 꼭 같은 말로 상황 설명을 했다.

  “아, 그러세요, D 씨가 친구이고 또 그 선생님한테 같이 배웠군요.” 손숙 씨의 말이다.

  “이야기 선생님이라고 그러셨는데~~.” 이어서 김승현 씨도 말을 더했다.

  우리는 선생님과 얽힌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7여 분 동안 나누었다.

  현재 양희은과 서경석이 진행하고 있는 MBC 여성시대는 1985년부터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흘러오면서 진행자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곤 했다. 그 당시는 매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전문 연극인 손숙과 사회자 김승현이 진행하면서 매주 목요일은 ‘남성시대’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했었다. 이들 두 사람은 빠른 말투와 재치로 박진감 넘치게 대화를 풀어나가면서 청취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사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는데 원고 청탁과 함께 D가 보내준  26년 전의 방송 녹음 파일을 다시 듣고 그때의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되었다.

  그 당시 가장 가슴이 아팠던 기억은 선생님께서 오랜 교직생활에서 성대결절을 얻어 발성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 방송이 있은 후 어느 주말, 부산에 사는 몇 명의 동문 후배들과 함께 고향에 계신 은사님을 찾아뵙고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린 기억이 있다.


  내가 D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이고 그의 부친은 역사 선생님이셨다. 남녀를 포함해서 한 학년이 세 반이었던 우리 23기에서 D는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 당시 명문 진주고에 입학한 후에도 줄곧 우수한 성적을 지켰으며 S대학에 진학했다. 나를 포함해서 한 해에 5명이 진주고에 합격한 것은 모교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일이고 그 친구들은 모두 내로라는 직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을 했던 1980년에는 전국 대부분 고등학교가 고교평준화가 되었고, 몇몇 중소 도시에서만 선발고사를 시행하고 있었기에 우리 고등학교는 예비고사 전국수석 배출을 비롯하여 전국 최고를 자랑했었다.


  선생님은 우리 중학교의 역사와도 같은 분으로 1기부터 39기까지 40년간 우리 모교에 봉직하셨다. 우리 가족에서도 나의  형님과  동생, 그리고  명의 조카들까지도 모두 선생님의 제자이니 우리 가족의 스승님이라고 할 수도 있다.

  2012년에 발간한 ‘가회중학교 60년 사’에  선생님께서 기고하신 회고록에 모교의 개교 1년 후인 1953년에 부임해서 40년간 고향의 사립중학교에 봉직하신 당신의 소회와 모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선생님께서는 6.25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할 정도의 수재였으나 가정 형편상 전으 환도하는 대학을 따라가지 못하고 휴학한 것이 마지막이셨다.

  때마침 1952년에 지역 선각자들이 십시일반으로 어렵게 설립한 고향의 사립중학교 부탁을 받고 임시로 교단에  것이 사슬이 되어 한평생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셨다.  

  처음에는 정비되지 않은 시스템에서 지역 봉사 차원으로 교사 생활을 시작하셨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격증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교사 생활 시작 후 교사자격 검정고시까지 20년 경력을  교육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셔서 승진뿐만 아니라 퇴직금도 동료들처럼 받지 못하고 노년을 보내셨다니 가슴이 많이 아팠다.

  선생님의 회고록에서 ‘그래도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알아주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시골 사립중학교는 전공과목이 따로 없고 한 분의 선생님이 상황에 따라  몇 개 과목을 동시에 가르쳤다. 선생님께서는 재직 중에 영어와 체육을 제외하고 모든 과목을 가르치신 경험이 있다고 하셨다. 특별히 음악 교사 경험담에서 '처음에는 악보도 볼 줄 몰랐고 오르간도 칠 줄 몰랐었는데 독학으로 공부해서 음악과목을 가르치셨다.'는 말씀과, '교가를 작곡하신 선생님의 퇴임 후 분실된 교가 악보를 스스로 채보함으로써 지금까지 교가가 이어질 수 있었다.' 하시니 정말 다재다능한 분이셨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께서는 음악과 역사 과목을 가르치셨다. 선생님께서는 교사생활 수십 년 동안 분신처럼 아끼시던 교편을 퇴직 후에도 벽에 걸어놓으셨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그 교편으로 벽에 기대어 국사와 세계사의 정사뿐만 아니라 야사에 얽힌 많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엉뚱한 짓이라도 하면 급하신 성미에 “얄마 얄마 너 이리 나와.” 하시는데 어느 순간 딱 소리와 함께 머리통을 감싸고 얼굴을 찡그리는 친구들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 교편이야기는 보다 다섯 살 많은 큰 형님도, 여섯 살 아래의 조카들도 다 알고 있으니 선생님의 마스코트이자 수많은 제자들의 스승이 아닌가 생각된다.  

  3년 전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들었지만 창궐하는 코로나로 인하여 직접 조문하지  못하고,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조화로만 인사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서 지난해 사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가장 먼저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조문을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1972년 ‘전국 중등교원 교단수기 현상모집‘에서 우수상을 받으셨다고 한다. 퇴임 후에도 글쓰기를 좋아하셔서 여러 지방신문에 많은 글을 기고하시고, 4권의 수필집을 발간하셨다. 은사님께서 돌아가시고 3주기를 맞아 생전에 출판하지 못한 유고들을 모아 D가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니 친구가 자랑스럽기도 하다.


  중학교 다닐 때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무척이나 내성적이었던 나는 선생님의 자녀는 왕자라도 되는 양 가까이 지내지 못했는데, 친구 D의 따뜻한 마음을 알게 된 후부터 친하게 지내고 있다. 더욱이 지난해 나의 막내아들이 대기업에 취직하여 서울에서 원룸을 구할 때 그는 외부 강의 일정으로 점심식사만 함께 하고 떠났지만 그의 부인이 손수 운전을 하며 하루 종일 도와준 고마움은 잊을 수가 없다.

  은사님의 유고집 발간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내 친구 D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더 큰 발전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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