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 혈연, 엘리트, 그 차가움
학회에 이제 막 도착한 반청바지 차림의 그녀는 자신감이 넘쳐나는 얼굴로 가볍게 칠판을 응시하며 나의 옆자리 빈 책상에 앉았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고등과학원 김상현 교수도 가방을 멘 차림으로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한국에 잘 왔다며 말을 건넨다. 둘이 영어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나는 그녀가 내일 오전 세션의 두 번째 스피커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여러 명의 연사들 중 여성의 이름은 단 한 명이었고 김교수가 말을 건넬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슬쩍 둘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녀가 구사하는 영어 억양을 통해 나는 그녀가 중국인이라는 것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단발머리의 꾸밈없는 약간 투박한 외모로 보아서도 그녀는 대륙의 중국인일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으로서 우리나라 최고의 연구기관인 고등과학원에서 열리는 학회에 초대받는다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거꾸로 내가 미국에 있는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 초대받을 기회가 내 평생에 한 번 있을까 생각해 보면 이번 학회에 모습을 나타낸 그녀는 과연 범상한 인물이 아닐 것이다. 연예계나 스포츠계에는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밑바닥에서부터 기반을 다져서 마침내 재능을 꽃피우는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이목을 끄는데 대체로 이곳에서의 성공이란 어떤 작품의 커다란 성공이나 흥행, 혹은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 같은 대회에서의 우승 같은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될 만한 사건이라서 그럴 것이다. 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의 반전이야기는 '최강야구'에는 존재하지만 차가운 과학으로 불리는 수학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는 어떤 인물일까?
사실 수학계란 곳은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귀족중심의 계급주의 사회이자 이너 서클(Inner Circle)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 곳이다. 이는 대학이 생겨난 역사를 추적하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인데 대체로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국가에서 최초로 설립된 대학이 가장 종주의 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 대학의 교수가 된다는 것은 탁월함을 인정받아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아이비리그에 속한 대학들은 역사가 오랜 대학들로 미국의 다른 주립대학들보다 대체로 오래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1636년에 설립된 하버드대학은 미국 청교도역사와 함께 만들어진 대학으로서 미국의 심장과도 같은 대학이며 이 대학의 모든 학부와 대학원의 교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능력 있는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프린스턴대학은 이보다 100년 뒤인 1746년에 설립되었는데 이 둘은 서로 붙어있는 대학들로 프린스턴 대학의 수학과 역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프린스턴 대학이 보다 개방적이라고 판단하는데 이유는 프린스턴 대학에 좀 더 외국인 출신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옆동네 MIT를 슬쩍 끼어넣고 보면 이들 대학의 교수는 모두 이 트라이앵글의 학문적 교류에서 성장한 사람들이다. .
다시 그녀의 약력을 보니 그녀는 중국의 북경대학을 최우수로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른 나이에 많은 논문들을 써내어 미국 워싱턴 D.C 근교의 명문대학인 메리랜드대학의 조교수로 부임한 떠오르는 스타였다. 논문을 써내기 쉽지 않다고 알려진 위상 및 기하분야를 전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학위 이후 20편을 출판한 것을 보면 재능이 넘쳐나는 젊은 학자로서 뭇 남성들과의 경쟁을 물리치고도 남을 성과를 보유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중국에서 최고의 교육기관인 북경대학 출신이 아니었다면 하버드, 프린스턴, MIT, 버클리와 동급인 시카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을까? 대학원 입학에서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학생이 받은 교육의 수월성이며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수학자들이 있는 곳에서 제대로 된 지도를 받았는가의 여부이다. 그러므로 학부생활동안 한 번이라도 방황의 시기를 거치거나 인생의 시련을 맞이하여 학부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의 탁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이비리그나 혹은 최고의 공립대로 알려진 버클리에 진학할 수 없게 될 것인데 이는 나중을 보면 귀족적 삶이 아닌 평민으로서 삶을 시작하는 것과도 같다.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신분이 세습되지는 않는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하버드 대학과 동급인 대학에서 학위를 받아야 하며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될 만한 업적을 보유해야 함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하버드 대학 동문이어야 한다. 표면적으로 관찰되는 이러한 일련의 생애에 걸친 중요한 Resume에는 최고의 교육기관에서 최고의 교수들과 함께하는 fellowship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이것을 운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 또는 그녀가 반드시 훌륭한, 혹은 그 분야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학자들을 만나기 위해 그러한 위치에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서있었어야 가능했다는 점에서 일단 생애 최초로 어느 대학에 입학하느냐는 너무나 중요한 과정의 첫 단추라고 생각된다.
즉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다시 최상위 학부를 입학하며 휴학이나 유급 없이 어려운 공부에 매진하여 최우등으로 졸업하는 것은 일견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뛰어난 자질과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론 인생의 굴곡이란 누구에게나 같을 수는 없겠지만 나름 평탄하고 순탄하게 주어진 길을 부지런히 걸어갈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금 느끼면서 그녀의 여유만만한 발표를 들었다. 부드러운 소개도 없이 바로 문제를 설명한 뒤 문제를 풀게 된 증명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칠판 가득 수식으로 설명하는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이 머릿속에 있는 듯 막힘없이 술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여해야 그녀와 같은 커리어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인지..
똑같은 시간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쓰는가는 어린 시절의 공부가 가장 중요하며 20대 초중반이 자신의 계급을 결정하는 데 있어 너무나 중요한 순간임을 어떻게 그녀는 그렇게 일찍 깨달을 수 있었을까? 수학에서 뛰어난 학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야의 최전선에서 그 경계를 확장하는 일을 하고 있는 수학자를 만나야 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가 있는 최고의 교육기관에 입학하여야 하며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혹은 그가 제시하는 문제를 이해하고 풀기 위해서 충분한 소양을 배양하여야 함은 결코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편안하고 평화로운 나날들이 계속 쌓여야 가능한 누적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너서클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학자의 삶은 먹고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귀족들(이너서클의 수학자들)과 달리 늘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려 살아간 봉건시대 평민들의 삶처럼 때로는 누추하고 때로는 행복하며 때로는 괴로운 삶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