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보른, 3대에 걸쳐 사랑과 봉사로 헌신
한국 성결교단 창시자 중 한 사람
어니스트 길보른(1865∼1928)은 한국 성결교단의 모체인 《동양선교회》 설립자 중 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정신을 실천한 선교사이다
그는 1865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태어났다. 전신 기사로 일하다가 동료 카우만의 전도에 의해 무디 성경학교를 수료하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후 1902년 신학교 공부를 수료하고 목사 안수받았다.
* 카우만은 전신 기사의 삶을 살다가, 1889년 9월 심프슨의 설교에 감동하여 선교사로 헌신했다. 1901년 일본에 와서 활동하다가 1905년 11월 길보른과 나카타 쥬지와 함께 일본에서 동양선교회를 창설하고 초대 총장이 되어 성결 교단을 이끌었다.
그는 먼저 일본에 간 카우만의 요청으로 1902년 8월 일본에 도착하여 사역을 시작했다. 동경에서 동양 선교회 창설에 협력하였고, 부총장으로 사역했다.
1907년 2월 한국인 김상준과 정빈 두 유학생이 서울 종로에 복음 선교관을 설립하여 성결 교리를 전파함에 따라 길보른도 이때 내한하여 성결교 전파에 힘썼다. 당시 한국은 평양 대부흥회 영향으로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는 때 였다. 그 후 그는 일본에 거주하면서 한국을 빈번하게 방문하며 한국에서 성결교 확장에 기여했다.
* 김상준(1903년 일본 동양선교 학교에 입학)과 정빈(1905년 입학)은 일본에 유학 가서 동양선교학교 다니며 한국인 최초로 성결교를 접하였고,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 동양 선교회》를 세웠다.
1921년 한국에서 헌신하던 영국의 존 토마스 감독이 병으로 귀국하게 되면서, 그는 한국 책임자로 파송되어 5년 간 서울에 거주하며 한국 성결 교회의 발전에 헌신하였다.
1921년에 한국 성결교회는 선교 단체에서 성결 교단으로 인정받고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명명하였다. 감독 제도를 폐지하고 이사 제도를 실시하였다. 1922년에는 한국성결교회 기관지 《활천》을 창간해 성결교의 핵심 교리인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전했다.
그 후 그는 미국 동양선교회 본부(OMS ) 초대 총재인 카우만이 1924년 소천하여 2대 OMS 총재로 임명받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년 만인 1925년 10월 다시 중국에 가서 선교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이듬해 중국 사역을 아들 어네스트 길보른에게 인계하고 한국에 와서 생활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귀국했다. 1928년 4월 향년 64세를 일기로 미국 로스엔젤스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아들 어네스트 길보른과 손자 엘마 길보른이 대를 이어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아들 어네스트는 중국에서 사역하다가 공산당의 탄압이 심하여, 1947년부터 한국으로 건너와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와 협력하여 OMS 선교 업무를 지속했다.
손자 엘마는 세계 구호위원회 대표로서 이 땅에 고아원과 양로원 86개를 설립하고, 김제지역 야산을 농경지로 만들어 식량 공급에 기여하였다. 현재 길보른 재단이 운영되고 있으며 사회 복지관과 어린이 집을 운영하고 있다. 3대에 걸친 선교 이야기는 책 <길보른 연구 논총>으로 발간되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