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화이팅, 3.1 운동을 미국인에 알린 선교사
북한 지역 재령 제중 병원을 설립한 의료 선교사
해리 화이팅 선교사(황호리, 1865~1945)는 황해도 재령에서 재령 제중 병원을 설립하여 환자를 돌보는 등 17년간 이 땅에서 헌신하였고, 특히 귀국 후 일제의 만행을 미국에 알린 선교사이다.
그는 1865년 7월 미국 아이오와 주 헨리 카운티에서 비교적 부유한 은행가의 막내 이들로 태어났다. 파슨스 대학 예비 학교를 졸업한 후 장로교 목사로서 목회했고 또한 의사 자격도 가지고 있었다.
1903년 11월 38세의 나이에 미국 북 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파송받아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그는 먼저 평양 제중원에서 활동을 시작하였고, 동시에 재령 등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환자를 치료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이때 평양의 길선주 목사가 눈병으로 실명 위기에 있었는데 수술하여 치료하였다.
그는 3년 후인 1906년 5월 재령 선교 지부가 개설되면서 의료 선교사가 필요되어, 헌트 선교사(재령 선교의 아버지)와 함께 재령으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1908년 미국 교회의 후원을 받아 재령 제중병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과 함께 한국인 의료 조수들에게 서양 의학을 가르쳤다. 그는 1918년 의료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1919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국에 돌아가서 한국의 실상을 미국인에게 일리는 일을 하였다. 당시 미국인들이 한국의 상황을 모르고 일본 언론에 속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한국 친우회에 가입하여 호소문, 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로스앤젤레스, 애틀랜타 등 교회에서 266회 강연을 했고, 1921년 10월에는 덴버에서 일주일 동안 강연하고 덴버 한국 친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의 《호소문》 형식의 글이 2013년 한국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호소문은 첫째 3·1 운동의 상황 설명, 둘째 군사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한 일제의 탄압 행위, 셋째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식민통치의 허구와 실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17년간 한국에서 보고 느낀 것과 선교사로부터 직접 받은 자료에 기반하여 생생하고 강연하여 미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의 강연으로 많은 미국 내 한국 친우회가 21개 결성되어 한국 독립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등 다방면에서 독립을 협력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목회 활동을 지속하다가, 1945년 8월 18일 한국이 독립하던 바로 그때 아이오와 주 제퍼슨 카운티 페어필드에서 소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그에게 추서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