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코잇, 순천 복음화의 선구자로 활동
순천 선교부 초대 선교사로서 교회 및 매산 학교 설립
로버트 코잇 선교사(고라복, 1878~1932)는 순천 선교부를 설립하고, 순천 매산 학교 및 교회를 설립하였다. 17년 동안 순천에 상주하면서 전남 동북부 지역을 순회하며 헌신한 선교사이다.
그는 1878년 12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샬럿에서 태어나 솔즈베리 시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데이비슨 대학과 루이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6월 미국 남 장로교 맥클렌버그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1907년 7월 해외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세실 우즈와 결혼 후 1909년 3월 목포에 도착하였고 남 장로교 사역지인 광주 선교부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전남 지방을 담당하던 오웬 선교사가 순직하여 그의 일이 코잇과 프레스톤 선교사에게 맡겨졌다. 특히 전남 동남부 지역인 순천에 선교 거점을 세우기로 한 일이었다. 프레스톤은 미국에서 기금 마련에 힘썼고, 코잇은 순천에서 부지 매입, 건물 신축 등 예배당 건설에 집중했다.
코잇은 1909년부터 1912년까지 광주에 살면서 오웬의 영역이었던 전남 남부지역을 순회하며 교회들을 돌보았다. 이때 전국적으로 진행하던 <백만 명 구령운동>에 가담하여 쪽복음, 전도지 배포 활동에도 협력하였다.
1910년에는 프레스톤(변요한, 1875~1975)과 함께 순천시 금곡동에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예배를 시작하였고, 학생들을 모아 성경과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1년 순천시 매곡동에 천막 교사를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순천 매산 중고등학교(기존 은성 학교)가 되었다. 그는 설립자 겸 초대 교장으로 헌신하였다.
1913년 4월 가족이 모두 광주에서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프레스톤 선교사 가족과 함께 이동했다. 그런데 애통하게도 순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질에 걸린 하인이 가져다준 우유를 먹고 두 아이가 하루 간격으로 죽는 일이 일어났다. 너무나도 비통한 일이었으나, 코잇 부부는 낙심하지 않고, 선교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코잇 부인은 오히려 주변의 선교사들을 위로했다고 전한다. 자녀들은 매곡동 산언덕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원으로 이장되었다.
그는 순회 전도 활동을 실시하였는데, 1915년부터 1929년까지 구례와 광양 지역을 순회하였다. 그는 이 지역에 30여 개 교회들을 세웠고, 교회 부속 8개 초등학교와 3개 유치원을 설립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가 시무하거나 설립을 후원한 교회는 순천 평촌 교회를 비롯하여 화순 대포 교회, 보성 운립 교회, 구례읍 교회, 구례 대유 교회, 광양 백암 교회, 섬거 교회, 순천 구상 교회, 용당 교회, 대치 교회 등이 있다. 그는 예배당 설립 외에도 학교와 병원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몇 차례 선교잡지 기고를 통해 교회 내 초등학교 운영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에는 지리산 노고단에 선교사 수양관 부지를 설정하고 질병과 더위를 피해 선교사 가족들이 휴양하도록 했다. 그리고 코리아 미션 필드에 여러 차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의술과 기도의 관계>, < 천막 집회>, <주일학교 통신>, <복음 사역>, <농촌 독서 운동> 등의 발표 논문이 있다.
그는 1929년 2월 심한 독감에 걸렸고, 시간이 지나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그 해 10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홉킨스 병원에 입원하여 2년 6개월간 투병했으나 이겨내지 못하고 1932년 5월 소천하였다. 향년 54세 나이로 하늘나라로 떠났고, 시신은 청소년기를 보낸 솔즈베리에 안장되었다.
참고 자료 : 한남대 송현강 교수 논문, <한국 기독교와 역사 4호>, 순천시 디지털 순천문화대전 자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