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장로교가 선정한 세계 위대한 선교사 7인
엘리자베스 세핑(서서평, 1880~1934)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고아의 어머니, 한센병 환자의 어머니로 불린다. 광주를 중심으로 22년간 한국인과 동일한 복장과 식사를 하며 음지의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하여 미국 장로교에서 선정한 전 세계 <위대한 선교사 7인>에 선정되었다.
그녀는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나 할머니에게서 자랐으나 9세에 할머니마저 사망하여 어머니가 있는 미국 뉴욕 외곽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그녀는 간호학교를 졸업 후 간호사가 되었다.
그녀는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출석한 후 카톨릭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이때 카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개종 반대로 어머니와 의절하기까지 하였다. 1911년 어느 선교사로부터 한국에 전염병이 많아 의료 사역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1912년 2월 남 장로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32세에 한국에 왔다. 그녀는 남 장로교가 사역하던 광주 제중원 병원에 배치되어 간호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광주 애락원(한센병 병원)에서 2년간 환자를 돌보았고, 군산 구암 병원에서 3년간 일하였다. 그녀는 군산에 간호사 양성학교의 필요성을 알리고, 장로교단에 학교 설립을 요청하는 등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17년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두 명의 한국인 제자(이효경, 이금전)와 함께 이동하여 그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고 토론토 의대에 유학을 보내 한국인 의사로 양성하였다. 그녀는 3년간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역하면서 한국 간호계의 중심 리더로 활동하였고, 에스더 쉴즈 및 에드먼즈와 함께 한국 간호계를 이끄는 트로이카로 활동하였다.
* 이효경은 조선 간호부 부회장 및 만주 동포 위문단을 이끌었고, 이금전은 연세대 간호대학장과 대한 간호협회장을 역임했다.
서울에서 항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일본으로부터 세브란스 병원 근무를 거부당하여 다시 광주로 내려와서 광주 제중원에서 사역하였다. 그녀는 광주 외곽 지역을 순회하며 진료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검정 치마에 흰색 저고리를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은 그녀의 모습은 연상 한국인이었다. 이때 한센병 환자, 노숙자, 고아, 창녀 등 어려운 사람을 돌보았다. 그녀는 14명을 입양하여(그중 1명은 한센병 어린이) 자신의 자식으로 양육하였고, 결혼까지 시키면서 부모의 도리를 다하였다.
1922년 배움의 기회를 못 가진 여성을 위해 학교를 시작했다. 이후 미국인 친구 루이스 니일(Lois Neel)의 후원을 받아 그녀의 이름을 딴 이일학교로 개명하고 학교가 확장되었다. 이일학교가 현재 한일 장신대의 전신이다.
1923년 그녀는 선교사와 한국인 간호사를 모두 포함하는 조선 간호부회(대한 간호협회의 전신)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일했다. 1934년까지 10년간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조선 간호 협회의 초석을 다졌다. 간호사용 교과서 편찬하고, 미국 책자 《간호 역사 개요》를 번역하고 출판하였다.
그녀는 사회개혁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소록도 한센병 환자 요양원 설립, 공창 폐지 운동, 간호사 양성소 확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간호협의회에서 한국간호협회의 정회원 가입을 추진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 일은 1949년 해방 후 가입함으로써 그녀가 떠난 후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낮아짐을 몸으로 실천한 그녀는 1934년 6월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자신의 선교사 급여를 모두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여 그녀는 영양실조로 사망한 것으로 판정되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시신은 의학 해부용으로 기증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은 광주 시민장으로 거행되었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여 광주 양림동 오웬 기념각에서 대규모 추모회가 열렸는데, 그녀가 돌본 창녀, 한센병 환자 그리고 걸인들이 넘쳐났다고 전한다. 조선 간호부회는 《한국 민족의 슬픔을 안고서 가신 님 》이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녀의 침대 맡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고 적혀있었는데, 현재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된다. 시신은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함께 사역하면서 그녀의 마지막 병상을 지킨 마거릿 프리처드(1930년 내한)는 세핑이 못다 이룬 꿈을 이어갔다. 프리처드는 1970년까지 40년간 이 땅에 거주하면서 전주예수병원 내 기전 간호대학 (예수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셰핑의 간호사 양성 일을 지속 추진하였던 것이다. 끝
참조: 조선에 온 벽안의 선각자들, 양국주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