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시원 여학교 교장 및 시골 교회 순회 전도 활동
넬리 스콜스(시넬리, 1881~1919)는 진주 시원 여학교 교장으로 헌신하다가 38세에 순직한 교육 선교사이다. 그녀는 독신으로 지내며 진주의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하여 진주 시민들이 사랑한 선교사로 기록된다.
그녀는 1881년 호주 빅토리아 칠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를 10살 때 잃는 슬픔을 겼었으며, 아버지가 학교 교장이었기에 자신도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 교사가 되었다. 교사로 근무하던 중 훗날 휴 커를 선교사의 부인이 된 에셀 앤스티(1905년 내한)를 만나서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한국 선교사로 먼저 파견된 에셀과 편지로 교류하다가 자신도 한국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여성 선교 훈련원에서 선교사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호주 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1907년 4월 부산에 도착하였고 커를 부부가 마중을 나왔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녀는 부산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언어 습득이 빨랐다. 그리고 그해 10월 메리 켈리와 함께 진주 선교부에 배속되었다.
메리 켈리와 커를 부인(에셀 엔스티)은 여성에게 성경을 가르친 반면 그녀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교육했다. 1908년 10월 커를 부부가 안식년 휴가로 호주로 일시 귀국하면서, 진주의 교회와 학교를 스콜스와 켈리 두 여선교사가 담당했다.
*메리 켈리 선교사는 1905년 내한하여 진주 및 부산에서 사역하였고, 한센병 선교사로 알려진 매켄지 선교사와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1964년 1월에 소천했다.
1909년 2월 진주교회에서 백정 신자들과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 스콜스와 켈리 두 여선교사의 노력으로 1907년 8월 1일 주일에 동석 예배를 드리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주 안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하나인 것을 인식시킨 것이다. 백정들이 몇 주간 교회에서 물러나겠다고 제안하였고 양반들이 이런 호의에 감동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그녀는 1908년 여학생 교육을 중시하여 남학생과 분리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별도 가옥에서 교육을 시작했고, 학교 이름을 정숙 여학교로 명명했다. 그 후 커를 선교사 부부가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하자 여학교를 전담으로 맡아서 교육 사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이 학교가 정부의 인가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가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이 훗날 시원 여학교가 되었다.
* 진주 시원여학교는 1908년 휴 커를 선교사가 땅을 구입해서 여학교와 진료소로 사용할 방 세 개가 있는 작은 집을 지은 것이 시작이다. 그 후 스콜스의 노력으로 정식학교로 인가 받고, 1925년 2층 120평 규모의 목조 사옥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시원 여학교는 일본의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1939년 결국 폐교당하였고 6.25 전쟁 때 전소되어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녀는 시원 여학교 교장으로서 10여 년 헌신하였다. 1913년에는 시골 순회 전도 사역을 감당했으며, 순회 전도와 성경 공부반을 즐겁게 사역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1915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심장 관련 병) 시골 순회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캠블에게 위임하고, 학교 운영에만 전념하였다. 1917년 동생이 프랑스 전선에서 전사하여 큰 아픔을 겪었고, 그해 7월 호주로 휴식을 떠났다. 호주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 1919년 4월 14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호주 선교회는 그녀의 생애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녀의 생애는 이 나라에서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아낌없이 드려졌다.... 그녀에게는 상냥함, 지혜, 재치와 인내가 발견된다. 그녀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들 중에서 대부분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1921년 그녀의 헌신을 기념하여 진주 광림 학교의 여학생 부문을 《넬리 스콜스 기념 학교》로 명명하였다. 한국 이름은 《시원(柴園) 여학교(Scholes' Garden School)》인데, 번역하면 《시 교장의 정원 학교》라는 뜻이다. -끝-
참조 : 호주 선교사 열전, 이상규/양명득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