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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데이비스, 진주 베돈 병원에 헌신한 의료 선교사

삼촌이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로 대를 이어 헌신

by 신재천

진 데이비스 선교사(대지안, 1889~1981)는 진주 베돈 병원 여의사로서 23년간 이 땅에서 헌신하였다.

그녀는 1889년 3월 호주 빅토리아 주 번인용이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 최초 호주 선교사인 헨리 데이비스의 동생인 존 데이비스로서, 지역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즉 그녀는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조카이다.


그녀는 발라랏에서 사학 명문학교인 장로교 여자학교를 거쳐, 1914년 멜버른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1915년부터 왕립 여성 병원에서 의사 일을 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1917년 한국 선교를 자원하였다. 선교사 지원 배경은 삼촌인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순교와 언니 마가렛의 한국 선교사 활동에 영향을 받았다.

*언니 마가렛 데이비스는 1910년에 내한하여 1940년까지 부산 일신 여학교 교장으로 헌신한 선교사


그녀는 1918년 호주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PWMU)에서 파송받아 1918년 1월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잠시 머물다가 곧바로 사역지인 진주로 이동하였다. 진주에는 친언니가 사역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주 베돈 병원에 배치받아 사역을 시작하였다. 당시 베돈 병원 원장이던 맥라렌 선교사가 프랑스 전쟁의 군의관으로 떠나서, 그 빈자리를 그녀가 대신하게 된 것이다.


당시 베돈 병원에는 2명의 서양 의사가 있었는데, 통영에서 이동한 테일러 선교사는 남자 환자를 돌보았고, 그녀는 여성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진료하였다.(소아과, 산부인과) 그 후 1920년 4월 맥라렌이 프랑스 전선에서 돌아와 세 명의 의사가 환자를 돌보았다.


진주 배돈병원은 경상도에 유일한 병원이었기에 환자들이 넘쳐나서 병원 사역은 힘든 사역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명랑한 얼굴로 환자를 대하였다. 또한 새로운 의료 기술을 익히기 위해 북경 의학 세미나를 비롯하여 의료 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8년 당시 원장이던 테일러 선교사가 갑자기 소천하여 그녀가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원장 기간 동안 산중한 많은 과제로 인해 평소 웃는 얼굴에 웃음이 줄어갔다고 동료 선교사 커닝햄의 기록에 남아있다.


1941년 일제는 한국인을 병원 원장으로 요구하여, 김준기 의사를 원장으로 임명하고 그녀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신사참배 반대 영향) 또한 이때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완연하여 호주 선교부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의 철수 결정을 하게 된다. 그래서 23년간 헌신한 한국 사역을 마감하고, 그녀는 다른 선교사와 함께 호주로 돌아갔다.


그녀와 함께 근무한 김준기 의사는 <그녀는 성격이 깔끔하고 치밀한 성격으로 책임감이 강했으며, 명랑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또한 복음적 실천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선교사로서 진주교회 주일학교를 담당했고, 환자들에게 성경도 찬송가를 가르쳤다. 키가 작았으나 등산을 좋아했고, 아이들과 놀아주기를 좋아하는 선교사로 기록된다.


호주로 돌아간 뒤에도 선교활동을 지속하였는데, 1942년 에르나벨라 선교회, 1944년 뉴질랜드 구라 선교회에 소속되어 지역 환자를 돌보았다. 1968년 79세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했고, 1981년 91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멜버른 대학 의과대학에 기증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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