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북일상, 두렁마을 이야기
무더운 여름, 어릴 적 할머니 댁에 가면 항상 봉숭아 꽃물을 들였다. 여름이 되면 마당 한 켠에는 봉숭아 꽃이 예쁘게 피었다. 엄마와 함께 봉다리(비닐봉지) 가득 꽃과 잎을 따서 절구에 갈았다. (봉숭아 잎이 더 색이 더 짙게 나오기 때문에 잎을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좋다.) 그렇게 분홍색 꽃, 보라색 꽃, 푸른 잎까지 넣고 곱게 갈면 갈색빛을 띈 천연 매니큐어가 완성된다. 조금씩 손톱에 올리고 영화 한 편을 다 보면 손톱이 다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한 번 물들이는 것보다 두 세번 물들이면 색이 더 짙고 예쁘게 된다. 할머니 댁에 가면 할 게 없었던 나는 여름마다 봉숭아 물을 들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점점 자라면서 봉숭아에 대한 기억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 귀농하고 난 후, 우연히 봉숭아 꽃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꽃을 보자마자 어릴 때 추억이 되살아 났다. 나는 양손 가득 꽃과 잎을 따와 어릴 적 추억을 생각하며 봉숭아 물을 들였다. 다홍빛으로 물든 손톱을 보며 여름인 것을 실감했다. 여름이 다 지나갈 때까지 봉숭아로 손톱을 물들였다. 보는 사람마다 손톱이 예쁘다며 칭찬도 받으니, 더욱 기분이 좋았다.
어느 날, 옆집 할머니네 막내 손녀 주송이가 우리집에 놀러 왔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주송이가 오면 같이 게임도 하고 소꿉놀이도 하며 함께 놀아주었다. 하루는 주송이가 내 손톱을 보며 “언니 손톱 예쁘다. 나도 하고 싶어!”라며 매니큐어칠을 해달라 졸랐다. 순간 나는 나의 어릴 적 추억을 주송이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주송이와 함께 집 앞에 핀 봉숭아 꽃을 따와서 손톱을 예쁘게 물들여주었다. 주송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너무 예뻐 언니!”라고 좋아했다. 며칠 뒤, 주송이 엄마가 우리집으로 찾아왔다. 아주머니는 활짝 웃으며 말하셨다. “우리 주송이가 학교 가서 봉숭아 물들인 걸 자랑했더니, 완전 인기녀가 됐어! 애들이 다들 어디서 이렇게 예쁘게 매니큐어 했냐고 그러더라니까! 그래서 주송이가 너무 좋아하는 거 있지!” 나는 순간 너무 놀랬다. 요즘 아이들은 봉숭아 꽃을 모르는 것이 무척 충격적이었다. 봉숭아 물들인 것으로 이렇게 좋아하다니, 정말 신기하고 놀라웠다. 추석이 되자, 다시 주송이가 우리집으로 찾아왔다. “언니! 우리반 친구들이 다들 내 손톱보고 부러워해! 그리고 나 여기 조금 지워졌는데, 다시 해줄 수 있어?” 나는 주송이가 너무 귀여워서 다시 물을 들여주었다. 두 번째로 물을 들이자, 색이 더 짙고 예뻐졌다. 주송이는 무척 만족하면서 자신의 손톱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았다. 나는 주송이가 너무 귀엽고 기특했다. 그리고 주송이에게 잊을 수 없는 여름 추억을 전해주어서 무척 기뻤다.
엄마의 추억이 나에게 오고, 나의 추억을 주송이에게 전해주었다. 나의 추억을 누군가에게 전달해주는 것, 이것은 생각보다 무척 뿌듯한 일이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추억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기뻤다. 작은 꽃이지만, 봉숭아로 이어진 기억들이 세대로 이어지고, 역사로 이어져 항상 곁에 머무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