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는 시들 틈이 없었다

자국마다 무늬가 있었다

by 박다올

사랑을 하면,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배수구멍에 머리카락이 가득 막혀

물이 흐르지 않을 것 같아도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비좁은 틈을 헤집고 나와

갈증을 적셔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허파 어딘가 깊숙한 곳에는 숲이 있다.

초록으로 가득하던 그곳은

붉은 것과 짙은 남색이 스며들 때마다

천천히 검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재채기와 함께 검붉은 먹물을 토해 내면

씨앗들은 그 속에서 발아했고,

오염된 것들을 기공으로 빨아들여

조용히 흡착해 냈다.


우리는 서로가 토해 낸 것들로 서약을 적고

통증에 가까운 사랑을 즐기며

진혼곡에 맞춰 절뚝이는 춤을 추었다.

손톱을 자르면 달이 한 움큼씩 쏟아졌다.

조금 이르게 자르면 그믐달이 손바닥에 가득 찼고

초승이나 하현과 닮은 조각들도 쥘 수 있었지만

완전한 구를 가진 적은 없었다.


모은 것들을 힘껏 움켜쥐면 따끔거렸지만

상처는 남지 않았다.

나는 늘,

불완전한 것들에게서 완전한 것을 바랐다.


- 잠은 잘 잤어?

- 무슨 꿈을 꾸었어?

- 이제 약은 조금씩 줄여도 되지 않을까?


대화의 초점은 늘 같은 곳을 향했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우리는 그 신음을

폭죽처럼 환호했을지도 모른다.

기척이 스치면 충혈된 눈을 뜨고

형체를 더듬었다.

흰자 위에 얽힌 모세혈관들은

거미줄처럼 촘촘했고,

그 역시 부단한 시간의 결과였다.


쓰윽—

소리가 나면 처마 끝에 고여 있던 물이

염원을 토하듯 쏟아졌다.

그 순간, 그녀는 사랑받을 자격을 얻는다.

떨어지는 것은 벚꽃잎,

단 두 개의 절기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

계절과 장난처럼 엮이던 손길이 익숙해질 즈음

뜨개바늘에 날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서랍 깊숙이 숨겨 두면

검은 그림자가 꼬리를 물 듯 방 안을 뒤집으며

끝나지 않는 추격을 시작했다.

어떤 날에는 급히 바지춤에 숨기다

스스로를 베기도 했다.

나는 엉성하고, 무감각한 척을 잘했다.

그래서 어물쩡 넘어가는 날들이

의외로 쉽게 이어졌다.


무너지는 것이 두려웠지만

이상하게도 걱정되지는 않았다.

이미 겪은 것들,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것들까지

겹겹이 쌓여 있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은 상상으로 영상을 만든다.

장면들이 이어 붙여져

한 편의 영화가 되고,

그것은 꿈속에서 상영된다.


[제목: 아픈 사랑의 환영이 입술을 깨물 때]

[상영 시간: 8시간]

[줄거리: 365일]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정신 차릴 때가 되지 않았냐고 말했다.

하지만 잠에 들 때마다

꿈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과

대부분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로를 닮은 모순으로 나를 바라본다.

무력감과 함께

꽃밭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그곳은 국화 꽃들이

빨강, 초록, 파랑으로 피어 있었고

그것은 물감이 아니라

빛의 형태 색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색이 겹쳐질 때

비로소 가장 밝은 흰색이 된다.


비강을 파고드는 냄새들,

겨울의 영하 속에서

입김을 타고 스며드는 철의 향기.

항응고제를 섞어 향수로 만들면

320ml에서 400ml 정도가 된다.

그 향을 뿌리면

꽃들이 다시 피어난다.


/꽃말을 뭘로 정할까?

/나를 건들지 마세요는 어때?

/왜 그런 이름이야?

/봉숭아랑 같거든.

/우리가 겨울을 버틸 수 있을까?

/왜 못 버틴다고 생각해?

/나는 이미, 그 봉숭아 빛 손톱들을 전부 잘라 버렸거든.


그날,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잠들려 애썼다.

틈이 없는 곳에서는

숨을 참고서라도 잠을 청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사랑으로 둔갑한 새벽이

이불을 덮어 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간다.

함께 본 영화의 타이틀,

공간을 채우던 노래의 제목들,

마셨던 술의 상표와 담배 브랜드,

수많은 기념일들이 이어지고

마지막에 서로의 이름이

검은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크레딧이 끝나면

쿠키 영상처럼 남겨진 장면 하나.

혼자인 누군가가

노트 위에 글을 적고 있다.


“있잖아,

겨울에 헤어지고

봄을 보지 못한 건 다행이야.

눈은 많은 것들을 가려 주니까.

봄이 오면 추운 겨울을 못이기고

쌓여 있던 동물의 사체들이

조금씩 형태를 갖춰갈거야

봄은 잔인해.

무언가 개화할거라 믿었지만

우리는 결국

우리가 심은 하나의 씨앗을 뽑아냈잖아.

그래도 살아야 해.

사라지는 것들만 바라보고

버틸 수는 없으니까.

떠나는 것들에게도

조금은 애정을 남겨야 해.”


-

과거의 어느날

예기치 못한

꽃다발을 받을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것을 살릴 수 없으니까.

그래서 가능한 한 오래,

예쁘게 말라가도록

서늘한 곳에 걸어 두었다.

오늘의 기록에는

색을 잃은 능소화가 피어났다.

높은 담장을 타고 힘겹게 피어난 꽃이

시들 틈도 없이

송이째 떨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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