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비행기

당신은 어떤 비행기인가요?

by 골디

사회성이 아주 잘 발달하고 인간관계가 넓은 친구와 1년이 넘도록 살다 보니 인간관계의 양상이 이토록 다를 수 있구나 매일 느끼고 있다. 친구는 회사 안에서도 사무실을 한 바퀴씩 돌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주 말을 걸고 조금씩 친분을 쌓아가는 것을 아주 잘했다.


반대로 나는 내가 아끼는 사람 군 안에 들지 않으면 용건 없이는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사실 스몰톡을 지양한 게 아니라 정신을 놓고 있으면 그렇게 되었다. 관심 있는 분야나 집중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두루두루 어울릴 필요성을 잘 못 느꼈다. 타고나길 여러 사람들에게 줄 관심과 애정이 부족한가? 라는 자책 섞인 생각도 들었지만 에너지 레벨도 높은 편이고 챙길 사람들은 챙기기 때문에 그냥 스타일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하며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중 회사에서 작은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날은 회사에서 악성 민원인 응대 모의 훈련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내가 담당자(악성 민원인을 응대하는 상대방) 역할인지 몰랐다. 미리 공람해준 공문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4시 시작이었는데 3시 50분쯤 서무가 시나리오 한 장을 프린트해주더니 준비되었냐고 물었다. 시나리오에는 악성 민원인과 담당자, 주인공 두 명 빼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이름이 써있었다. 저지하며 적극대응하는 팀장님과 웨어러블 캠을 끼고 녹화하는 직원, 담당자를 대피시키는 직원은 누가 맡을지 기재되어 있었다. 왜 주인공은 이름을 쓰지 않았을까 갸웃거리며 나는 내가 같은 민원대로서 맞서 싸워주고 대응하는 여럿 중 한 명이겠거니, 그래서 내 이름은 없겠거니 생각했다. 준비되었다고 대답한 뒤 화장실을 다녀오니 거의 4시. 사람들이 내 자리 주변을 둘러싸고 얼른 담당자 연기를 시작하라고 했다. 속으로는 엄청나게 당황했지만 순발력을 발휘해서 훈련을 자연스럽게 마쳤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 어이없는 상황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일부러 상황 직전까지 배제하고 모두가 기피하는, 악성 민원인에게 폭언을 당하는 역할를 아무것도 모르는 나한테 넘긴 거 아니야? 직장 내 괴롭힘 뭐 그런 건가? 이런 건 어떻게 대응해야하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서무에게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고 따지자 그녀는 자기가 지난 주에 정말로 알려준 줄 알았다고,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설명했다. 일부러 그런 게 절대 아니며 정말 미안하다고 재차 사과했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갔고 다음으로 옆자리 주임님에게도

어떻게 안 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가 정말 알고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말과는 달리 표정이 정말 난감하고 좋지 않아 보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말도 했다. 그 순간 그날 점심에 둘이서 같이 밥을 먹으며 그녀가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자기가 원래 주변 상황에 대한 인지가 잘 되고 소리를 잘 들어서 자꾸 도움을 주게 되는데, 그런 스스로가 희생당한다고 여겨 요새 억지로 양옆 직원들의 상황을 무시하고 뭔가를 들어도 안 도와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던 말. 그걸 너무 열심히 하시다가 이런 일

이 생긴 건가? 그렇지 않고 정말 내가 아는 줄 알아서 이런 일이 생긴 거라면 저렇게까지 난처해하실 수 있나? 점심 때는 그녀가 그런 노력을 하고 안 하고의 차이를 잘 모르겠어서 굳이 그런 생각까지 하시다니, 그리고 그런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시다니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꼭 말해줬어야 했던 두 명만 이야기를 안 해줘도 나는 이 일을 모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밖의 직원과 이런 작은 행사에 대해 굳이 스몰톡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무의 잘못이 가장 크지만 옆자리 주임님의 그 “노력”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들

었다. 뭐가 그렇게 그녀를 서운하게 만들었을까? 그녀가 그런 차가운 결심을 하게 만들었을까? 뭔가에 집중할 때 거의 노이즈 캔슬링 되는 것 마냥 주변 소리를 못 듣는 탓에 나도 모르는 새에 제때 도와주지 못한 적이 많았나? 더 많은 세심한 관심과 애정을 담아 라포를 형성하지 못한 내 탓인가? 왜 나는 주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챙기지 못할까? 이런 일까지 발생할 정도로 내 회사 내 인간관계는 박살이 난 건가? 온갖 질문들 속에서 나는 자책하고 방황했다.


그때 나와 비슷한 성향의 다른 동 주임님에 이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나에게 경비행기라고 했다. 좌석 수는 적지만 어디든 바로 갈 수 있는 가벼운 경비행기.


“누굴 태울 필요가 있나요? 경비행기가 더 가볍고 낭만적인 거 아시죠.“


그 말이 경비행기보다 더 낭만적인 위로였다. 이 비유를 알려준 사람은 자신이 오지 탐사용 비행기라고 했다. 소수의 궁금한 사람들을 탐험하듯 천천히 알아가는 편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사람마다 비행기의 종류가 다를 뿐 우열을 가리는 것은 크게 의미 없고 자신만의 방식과 속도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 확신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경비행기의 장점을 잘 알지만 ‘나는야 행복한 경비행기~’로 끝나고 싶진 않다. 행동력 좋은 경비행기인 것은 괜찮지만 객석 수가 지금보다는 좀 많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요새는 서무에게 가서 새로 산 산리오 굿즈를 자랑하기도 하고 어색한 헛소리도 가끔 늘어놓는다. 다른 주임님들과도 별일 없이도 일부러 한마디씩 해보고 목감기로 고생할 땐 따뜻한 차도 슬쩍 놓고 튄다. 같이 살고 있는 대형 여객기에게 감사를 표한다! 바로 옆의 친구는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참 행운이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는지,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나가는 배식이 얼마나 퀄리티가 좋은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대형 여객기와 똑같이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저게 가능하다는 건 알게 되었으니 조금씩 객석을 늘려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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