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끽’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차를 담는 시간> 서평

by 골디

중국차 업계에 종사하는 팽주님과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다회를 하고, 찻자리를 함께 한 다른 손님의 권유로 갑작스럽게 가게 되었던 토림도예 전시전. 이름은 들어봤지만 어떤 작가가 만들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서촌을 방문하였다. 가는 길에 기물들이 매우 얇은 것이 특징이다 정도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다룰 때 조심해야만 할 것처럼 전부 얇은 편이었고 동시에 완성도가 높고 실용적이며 아름다웠다. 개완이 갖고 싶었으나 수색을 알기 어려운 황토색과 흑색 기물만 남아 있어서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랬던 토림도예의 김유미 작가가 쓴 책이라니 더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경기도 어느 시골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고즈넉하고 평화롭지만 한편 치열한 고민과 인내를 하는 예술가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미친듯이 다채롭고 분주하기만 한 삶을 살고 있던 터라 이런 단조로움과 평온함은 읽어내려가는 것만으로도 꽤나 큰 위로가 되었다. 끊임없이 지하철과 계단을 오르내리며, 귀로는 음악을 듣고 눈으로는 영상을 보던 정신없는 출퇴근길. 업무 시작하자마자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바쁜 내 모습과 그녀의 일상은 너무나 달랐다. 고요한 작업실에서 향을 사르며 그날 일과의 시작을 스스로에게 알리고 차 한잔의 여유로 맞이하는 작업, 그리고 이후의 적막한 과정이 엄청나게 대비되었다. 내가 몇 주 전 굳이 용인의 산 속 절까지 찾아가 템플스테이를 통해 잠시라도 얻고자 했던 바로 그 적막이었다.​


작업을 할 때 웬만해서는 노래나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 꼭 필요한 작업이 아니면 대화도 하지 않고 각자의 작업에 집중한다. 정말 바쁘고 치열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느낌을 받을 때도 가끔 있다. 처음엔 뒤처지는 것 같고 멈춰 있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매일 큰 변화 없이 이렇게 돌아가는 일상이 좋다. 천천히 흘러가는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며, 만끽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만끽하는 삶.


19페이지, 차를 담는 시간 - 김유미 지음​



나는, 도시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만끽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만끽하고 있을까?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뭘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시간만 지나가고 있진 않을까? 가끔은 내 삶의 조종대, 그 중에서도 브레이크를 잡고 느리게 가고 싶을 때는 천천히 바깥 풍경도 보면서 이동하고 싶다. 계속해서 의식하지 않으면 쉬이 놓치게 되는 부분이다.

책을 보며 그녀가 민끽하는 것들을 나도 향유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특히 차와 향이 그러했다. 계절 내내 보이차, 봄에는 햇녹차, 여름에는 백차, 가을에는 청차와 홍차. 묵직한 시작과 달큼한 끝이 서로 다른 육계, 비오는 가을 날엔 일말의 고민없이 선택한다는 훈연 가득한 정산소종. 그녀처럼 계절이나 상황별로 차를 즐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차를 마실 땐 각각의 종류가 가지는 고유한 맛을 느끼며 맛의 깊이를 탐구하는 재미가 있다는 것도 공감이 되었다. 특히 지난 다회 때 어떤 차에서 미역 맛이 나서 놀랐던 순간, 암운을 느껴보려고 노력하면서 즐거워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맞아, 그 재미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서 채소나 과일, 심지어는 국물용 멸치마저도 풍미와 새로운 맛을 기대할 수 있다니 조금 더 살아갈 이유가 많아진 기분이 들었다. 그저 돈을 아끼기 위한 식재료 선택이나 빠르게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가 아니라 조금 더 미각에 신경을 써본다면 일상이 아주 조금은 더 재밌어지겠지.

향에 대해서도 다도와 마찬가지로 향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흔한 인센스 스틱마저 직접 써본 적 없는 나는 격화훈향이나 향전법 같은 다양한 향도와 그에 필요한 도구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폐 건강과 환기라는 화두에 매몰된 나머지 향 문화를 향유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짧은 길이의 선향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짧은 시간 안에 향과 함께 사르고 새로운 시작의 기분을 내는데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그리고 개완에 관하여 쓴 부분도 공감이 가면서 또 작가의 관점이 신기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친구의 언니가 운영하는 도자기 공방에서 개완을 직접 만들어본 적이 있다. 심지어 그건 내 생에 처음으로 도자기를 만들어보는 기회였는데 보통 머그컵이나 그릇을 만드는 것과 달리 나는 정말 호기롭게도 개완을 만들어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호언장담과 반대로, 내 개완은 뭉툭하고 뚜껑과 몸통의 합이 전혀 맞지 않았으며 실제로 사용하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뚜껑과 잔이 전반적으로 두꺼워서 들어서 출수하기에 무거웠고, 꼭지와 잔의 테두리에 금방 열이 전도되어 차를 내리느라 닿을 수 밖에 없는 엄지, 검지, 중지손가락이 너무 뜨거웠다. 이와 정반대로 내가 전시에서 본 토림도예의 개완은 두께가 얇고 가벼워 참 실용적이었다. 실제로 완성된 버전을 가지고도 세달에서 일년 정도 실사용을 해보며 부족한 점을 또 보완해나간다고 하니, 진정성과 장인 정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지난한 과정에 대해서도 ‘만들고 써보고 수정하는 일을 10년씩 해도 여전히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다.’라는 구절을 보고 정말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을 진심으로 즐기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곧 자신과 예비남편을 위한 작업실을 연다. 토림도예가 시작했던 때를 회상하는 설명이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는 이들에게 겹친다. 그들에게도 어쩌면 앞으로의 순간들이 힘들고 열악했지만 가장 많은 연구와 실험으로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낭만있는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그 과정을 즐기는 마음으로, 또 오늘이 제일 좋은 날일거라는 김유미 작가와 같은 마음으로 친구도 잘 버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토림도예처럼 잘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정말 좋겠다. ​


이제 새로 오픈하는 친구의 작업실에서 곧 있을 두 번째 다회에 갈 준비가 다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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