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우정에 대하여

by 최재식

부부 생활 시즌 2 … 진짜 부부로 살아갈 두 번째 장


“남편? 그 사람 내 편이 아니야. 살아보니까 남의 편이더라니까? 인생의 로또야, 안 맞아.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안 맞는지 모르겠어!”


이런 우스갯소리, 혹시 당신도 들어보셨나요? 아니, 어쩌면 당신 자신이 하신 말일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가끔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보면서 ‘맞아,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하죠. 맞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희한하게 안 헤어지고 같이 산다? “어떻게 같이 사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답은 이래요. “돈 벌어 오니 참고 살지 뭐… 먹고 살고, 애들 공부시키려면 별수 있나요!”


그래서 제 주변에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은퇴만 해 봐라, 연금 반 갈라 이혼하든지, 하여튼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는 분들이 꽤 계세요. 안 그래도 요즘 ‘황혼 이혼’이 유행이라잖아요? 당신은 이런 얘기 들으면 어떠세요? 등골이 오싹하다고요?


은퇴하는 순간 남자들이 겪는 현실은 좀 가혹하지요. 한때는 떵떵거렸던 존재가 갑자기 다 찌그러진 양은그릇처럼 되어버리는 건 정말 한순간이죠. 은퇴한 남편만큼 아내 눈치 보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예요. 집에서 마늘도 까주고, 파도 다듬어주고, 심지어 멸치 똥까지 따주면 아내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꼴 보기 싫다”라고 눈총을 받기 일쑤라죠? 나가서 친구들과 놀다 들어오면, “돈도 못 벌면서 뭐하고 돌아다니느냐”라고 눈을 흘기고요. 아, 정말! 집에 있어도 눈치, 밖에 나가도 눈치! 듣기만 해도 공감되지 않으세요? 남편은 오늘도 웁니다…


은퇴 후 남편들은 인간관계의 폭이 확 좁아지면서 아내에게 더 많이 의존하려고 해요. 그런데 또 아내는 자녀나 이웃들과의 관계가 훨씬 끈끈해서 남편은 뒷전인 경우가 많고요. 저처럼 부부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막상 은퇴 후에 하루 종일 붙어있으려니 여간 낯설고 불편한 게 아니더라고요. 아이들이 취업이나 결혼으로 독립해서 빈 둥지에 둘만 덩그러니 남게 된 부부들이, 갑자기 늘어난 둘만의 시간에 적응하지 못해서 삐걱거리는 경우도 정말 많아요. 사실 많은 은퇴한 부부들이 ‘부부’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저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진짜 부부 생활’은 은퇴 후부터 시작되는 건 아닐까? 젊은 시절엔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바쁘게 살아가느라 정신없었잖아요. 이제야 비로소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는 거니까, 어찌 보면 지금부터가 부부 생활 ‘시즌 2’가 시작되는 순간일지도 몰라요. 예쁜 들꽃처럼 서로를 보듬으며 다정하게 사는 모습, 당신은 꿈꿔 본 적 있으신가요?


장수 사회가 되면서 부부 관계의 수명도 덩달아 길어지고 있죠.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서 부부 두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하는 기간이 30~40년이나 되잖아요. 그러니 은퇴 시기에 노년의 경제 계획을 짜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만큼이나 배우자와 진솔하게 대화하며 서로가 꿈꾸는 희망을 얘기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당신과 배우자는 이런 대화를 충분히 하고 있는가요?


혼자서 미루어 짐작하지 말고, 배우자의 입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직접 들어봐야 해요. 대화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노력이 필요하죠. 그리고 이런 부부간의 화합 노력은 머리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행동의 변화를 통해 실천해야 합니다. 제가 보니, 은퇴기에 특히 위험한 부부 유형이 몇 가지 있더라고요. 우리가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려면, 이런 위험 요인들은 과감히 제거해야 합니다.


∙ 나는 좋은 배우자라고 착각하는 것: ‘이 정도면 내가 당신한테 정말 잘하고 있지!’라고 서로 생각한다면, 거의 100% 삐걱거리게 돼 있어요. 착각은 자유, 하지만 부부 관계는 불행!

∙ 부부간에 공통의 취미가 없는 것: 친구가 “같이 여행도 좀 다니지, 그래?” 하고 권유했을 때, “무슨 재미로 배우자랑 여행을 다녀?” 하고 반문한다면, 그 부부는 좀 위험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따로 또 같이, 그게 안 되면 위험!

∙ 부부는 한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라도 샴쌍둥이처럼 모든 것을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함께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또 각자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면 분명 위기를 맞게 될 거예요. 적당한 거리 유지는 필수!

∙ 상대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내가 좋으면 저 사람도 당연히 좋아하겠지’ 하는 생각은 정말 위험해요. 서로에게 진심으로 관심과 배려가 없다면, 그 관계는 남이나 다를 게 없겠죠. 내 마음대로 해석 금지!

∙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냥 참는 것: 무덤덤함은 결코 좋은 게 아닙니다. 살갑게 “뭐해? 잘 지내요?” 하고 물어봐 주는 따뜻한 대화가 없다면, 부부 관계는 점점 서먹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냉전은 이제는 그만!


은퇴가 부부 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몰랐던 불편함도 생기고, 어색함에 서로를 더 멀리하는 경우도 허다하죠. 남편의 위치에서 혹은 아내의 위치에서 겪게 되는 현실적인 어려움들, 저도 앞에서 실컷 토로했고요. 솔직히 말해, 이 시기가 정말 쉽지만은 않다는 것, 당신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두 번째 장을 어떻게 써 내려갈지는 온전히 우리의 손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걸핏하면 말라붙는 게 실개천 아닌가요? 황혼의 삶도 딱 그 실개천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원천이 마르지 않도록 사랑을 계속 불어넣어야 해요. 삶의 피곤함이 아무리 찾아와도, 다시 활기를 찾으려고 애써야 하고요. 비록 힘에 부치고 연약해 보이고 비틀거릴지언정, 한 걸음 한 걸음 꿋꿋이 나아가면 당장 넘어지진 않을 거예요. 젊음에는 젊음만의 낭만이 있다면, 노년에는 또 노년만이 가질 수 있는 뭔가 모를 숭고함이 분명히 있잖아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런데 참 안타까운 건, 제 주위에는 ‘이혼’이라는 갈라서기를 결행한 친구들이 정말 많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친구들을 가만히 보면, 흔히 말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기보다는 하나같이 지치고 고달파 보이는 모습인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우리 사회는 황혼 이혼을 마치 새로운 ‘자유의 증표’처럼 예찬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눈앞이 이리저리 가려지면 속마음도 그쪽으로 자꾸 옮겨가게 되는 게 또 사람 마음 아니겠어요? 하지만 저는 묻고 싶어요. 가장 소중한 사람 없이 홀로 감당해야 할 고독, 정말 살맛이 날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존재는 부존재보다 낫고, 둘은 하나보다 낫다’고 믿습니다. 부부에게는 서로를 향한 ‘긍휼’이 정말 필요합니다.





자식 인생? ‘벽’ 말고 ‘다리’가 되어주세요!


제게는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삶의 가장 밑바닥 같았던 시절이 있었어요. 희망도 열망도 다 잃어버렸던 청소년기였죠. 경부고속도로가 막 개통되고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한창 많았던 1970년 봄,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몇 달 안 된 어느 날이었을 거예요. 저는 갑자기 학교를 자퇴하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어요. 서울만 가면 일류대 나와 국회의원, 장관쯤은 따 놓은 당상인 줄 알았죠.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만, 그때는 정말 그랬다니까요!


그게 얼마나 허황한 생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1~2년도 채 걸리지 않았어요. 검정고시를 치르긴 했지만, 일류대는커녕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죠.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이라는 곳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어둡고 힘들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찔해요.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왜 우리 부모님은 어린 자식의 대책 없는 무모한 상경을 말리지 않으셨을까? 아마 당신들처럼 없어서 배고프고, 못 배워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삶의 고리를 끊어주고 싶어서였을 거예요. 위험을 알면서도 오히려 속으로 지지하고, 잘되기를 간절히 빌어주셨겠죠. 혹시 당신의 부모님도 그러셨던가요?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저는 무심코 자식들에게 이런 기대를 하고 있더군요. “너희들은 좋은 환경에서 시작했으니, 나보다 더 나은 상류층 사람이 되어야 해!” 혹시 당신도 그런 기대를 해본 적 있으신가요? 왜 나는 자식들에게 예전의 내 처지를 그대로 대입하려 했던 걸까요? 하류니, 상류니 하는 것에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 나름대로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자식들에게, 저는 너무나 엉뚱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혹한의 추위에 난방도 안 되는 작은 다다미방에서 혼자 이불만 둘둘 말고 잤던 저의 그 시절과, 따뜻한 방에서 더운물을 마음껏 쓸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자식들의 꿈과 희망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부모가 자칫 ‘다리’가 아닌 ‘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요. 당신은 얼마나 빨리 깨달으셨나요?


우리 세대에게는 물질적인 성장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이 중요한 가치였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우리와는 또 다르잖아요. 나름대로 개성을 살려 살아가려고 하고, 굳이 옆 사람과 비교하려 들지 않아요. 그런 그들에게 우리 세대의 가치관을 강요하려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경험, 가치관, 행동 양식, 그리고 사고방식들이 자칫 그들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오히려 ‘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진심으로 지지해 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꼭 필요할 때만 조언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부모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꾸만 자식의 인생에 개입하려 들어요. 그게 마치 부모의 책임이고 의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너무 고답적이고 전통적인 생각 아닌가요? 완전히 엇나가는 것만 아니라면, 자식의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30대 중·후반의 아들과 딸에게 “너희들은 왜 꿈이 없어? 대학원도 다니고, 전문 지식도 좀 더 쌓지 않고 그렇게 살고 있어?” 하고 충고하고 싶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에이 참!”하고 저를 나무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혹시 당신도 이런 경험, 해보셨나요?


우리는 자식을 진심으로 응원하기보다는, 가끔은 한심하게 생각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심지어는 “네가 뭘 안다고?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하고 윽박지를 때도 있고요. 부모는 분명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하는 방식이 꼭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경향이 있어요. 자식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면서도, 막상 자식의 선택과 결정은 부모가 좋아하는 대로 하길 바라는 거죠. 하지만 자식을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사랑 방식은 결국 ‘다리’가 아닌 ‘벽’이 될 뿐이라는 것, 당신도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자식에 대한 투자, 어디까지 해야 할까?


오리 새끼는 길러놓으면 물로 가고, 꿩 새끼는 산으로 간다”라는 옛말이 있죠. 자식도 다 크면 각기 자기 갈 길을 택해서 부모 곁을 떠난다는 이야기인데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품 안에 있을 때나 내 자식이지, 크면 다 제 뜻대로 한다니까요.


우리는 가끔 자식과 부딪히며 힘들게 싸우거나 속이 새까맣게 타서 ‘무자식 상팔자’라고 한탄할 때도 있잖아요. 혹시 당신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으신가요? 그런데도 자식에 관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지원하게 되는 건 무슨 마음일까요? “자식 키워봐야 덕 볼 게 없다”라고 하면서도, 우리는 왜 자식에게 목숨까지 거는 걸까요?


“어차피 나는 글렀어! 자식이라도 잘돼야지…” 이렇게 체념하면서 여전히 자신은 돌보지 않고 자식 위주로만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그게 좀 안타깝다고 생각해요. 노년은 생각보다 길잖아요. 어설프게 자식 돕는다고 가진 모든 걸 쏟아부으면, 저 자신도 불행해지고, 자식에게도 오히려 큰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의 삶에 더 집중하면서 남은 노후를 계획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나를 잘 챙길수록 자식의 걱정을 덜어주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자식을 진정으로 챙기는 것이 될 수 있죠. 당신은 자신을 먼저 챙기는 편이신가요? 아니면 자식에게 올인하는 편이신가요?


요즘 세태는 정말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영리한 젊은이들은 결혼도 잘 하지 않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잘 안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저 자신들만 편하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제가 볼 때는 좀 타산적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어요.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자식은 부모에게 분명 ‘수익이 없는 자산’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꼭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골프 회원권은 수익이 나지 않는 ‘무수익 자산’으로 분류되지만, 수익이 없어도 그 ‘효용 가치’는 정말 높잖아요. 그걸 이용해서 즐겁게 놀고 사람들과 소통도 하고요. 골퍼들에게 회원권이 유용하듯이, 우리에게도 자식은 정말 효용 가치가 높은 존재입니다. 젊었을 때는 아이들을 키우는 기쁨과 보람이 있고요, 나이 들어 노년에는 그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든든한 존재 아닌가요? 당신도 그렇게 느끼시죠?


결론적으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자식은 우리가 소유하는 ‘자산’이 아니에요. 우리가 소유한 물건이 아닌 자식에게서 대체 무슨 수익을 바란단 말인가요? 그건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자식은 ‘내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사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식들과 가까이에서 관계하며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어요.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소유욕을 버리는 순간, 자식에게 거는 기대 자체가 달라져요. 미움과 갈등은 줄어들고 관계도 훨씬 좋아지더라고요.


요즘 손자를 키우면서 정말 많은 것을 느껴요. 제 뒤를 잇는 자식과 손자가 제 곁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냥 삶이고 행복입니다. 부모의 은혜로 자식이 커가듯이, 저는 자식의 보은으로 우리가 살아간다고 믿어요. 자식에 대한 진정한 투자는 어쩌면 물질적인 지원을 넘어, 그저 그들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하고, 그들의 독립된 삶을 인정하며, 필요한 순간에 든든한 ‘정신적인 지지대’가 되어주는 것 아닐까요? 당신도 자식이라는 존재가 주는 그 의미에 대해 저와 같은 마음 아닌가요?





손자는 축복, 황혼 육아는 ‘사랑의 값진 무게’


솔직히 손자 돌보기는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손자 볼래, 밭맬래?” 하고 물으면 “땡볕에 밭을 매겠다!”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았겠어요? 황혼 육아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당연히 해야지’와 ‘글쎄, 나는 못 해’가 아마 반반쯤 될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 육아를 해봤거나 하는 중이라면 후자 쪽에 훨씬 더 마음이 기우는 게 현실이죠.


우리 부부도 쌍둥이 손자 황혼 육아를 3년 넘게 했어요. 아들 내외가 출근하는 주중 육아는 저와 아내가 전담하고, 주말은 아들 내외가 맡아서 돌봤죠. 쌍둥이다 보니 저도 거의 직장 생활하듯이 하루를 온통 손자 육아에 다 보냈어요. 솔직히 손자 돌보기는 정말 힘이 많이 듭니다.


하지만 동시에, 손자들을 보고 있으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에요. 손자의 해맑은 미소 한 방이면 세상이 다 밝아지는 것 같고, ‘셋 자식보다 한 손자가 더 귀엽다’라는 옛말이 정말 실감 난답니다. ‘귀여운 손자 곁에 두고 오래오래 보려면 이 정도 값은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힘든 건 또 사실이에요.


가끔은 ‘그냥 내 생활을 하면서 보고 싶을 때만 보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스스로 다잡았어요. 생명이라는 건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도록 태어나기 때문에 돌봄이 필수적이잖아요. 게다가 자식 일이고, 또 결국 내 가족의 일인데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어요? 저는 손자 돌보는 일이 노년에 제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힘들다고 안 할 수는 없는 거고, 해야 하는데도 안 하는 것은 어쩌면 죄를 짓는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손자 키우는 것보다 더 의미 있고 값진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행을 가는 것, 문화센터에 나가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 떨면서 노는 것 같은 일상적인 노년의 여가 생활들이 손자 돌보는 일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들어서도 시들지 않는 삶을 산다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일탈도 해가며 살아가는 소위 ‘불량 노인’보다는, 손자 돌보며 따뜻한 사랑을 주는 ‘착한 노년’이 훨씬 더 멋지지 않나요?


손자 육아만큼 큰 보람을 주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저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것을 이 손자들에게 베풀어주고 싶어요. 제멋대로 자란 손자가 나중에 잘못된 길로 빠져서 나쁜 짓만 골라서 한다면, 그때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저는 손자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제 황혼의 인생을 가득 채워주는 손자들에게, 오히려 제가 ‘고맙다’ 하고 말하는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체로키족 인디언들의 아이 탄생을 축복하는 기도가 제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이제 또 한 사람의 여행자가 우리 곁에 왔네.

그가 우리와 함께 지내는 날들이 웃음으로 가득하기를.

하늘의 따뜻한 바람이 그의 집 위로 부드럽게 불기를.

위대한 정령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기를.

그의 모카신 신발이 여기저기 눈 위에 행복한 발자국을 남기기를.


저는 고생이 따르는 사랑이야말로 진짜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손자 세대를 향한 마음이 딱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 꽁꽁 언 밭고랑 아래에서도 봄은 이미 올라오고 있어요. 어느새 따뜻한 봄바람이 불면 파릇파릇 새싹이 자라나고요. 손자들이여! 너희들이 우리에게 주는 이 희망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점점 나이가 들지만, 너희들이 이렇게 태어나 세상을 이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 너희들의 삶은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어요. 우리 손자 손녀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라서 그 약속된 것들을 모두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실 세상은 여러 면에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잖아요. 인류는 점점 더 건강해지고 있고, 예전보다 가난은 줄어들고 있어요. 끊임없이 늘어나는 지식과 기술의 발전은 너희들의 삶을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지게 할 거라고 확신해요.


∙ 우리는 너희들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 몫을 다할 거예요. 그저 사랑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손자 손녀들에게 ‘무한한 도덕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살면서 어떤 일에 보상이 없으면 괜히 섭섭한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잖아요? 하지만 조손 관계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아무런 보상 없이 책임감으로 주는 사랑, 그게 진정한 사랑 아닐까요?


∙ 우리 노년들은 스스로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산하며 영광을 얻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후세대를 위해 필요한 ‘밑거름’이 되는 것을 더욱더 보람 있는 일로 여기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너희들에게 결코 큰 부담을 지우는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 기성세대의 욕심 때문에 너희들의 삶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철저히 자제하려고 해요.


∙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단순히 현세대의 행복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미래 세대까지 함께 누릴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행복’,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목표입니다. 너희들, 손자 세대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꿈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에게는 ‘혁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거친 질문 대신, ‘영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시대를 물려주고 싶어요.


결론적으로 손자들은 우리에게 육아의 무게만큼이나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는 존재이며, 그들에게 베푸는 사랑은 우리가 미래 세대를 위해 남길 수 있는 가장 값지고 지속 가능한 유산입니다. 그러니 힘들어도 기꺼이 사랑하세요, 손자는 사랑 그 자체니까요!





우정의 조건, 당신의 우정은 안녕하신가요?


우리는 흔히 친구 사이의 아주 두터운 정을 말할 때 ‘금란지교(金蘭之交)’라고 하죠. 그 단단함은 쇠붙이를 자를 수 있을 만큼 견고하고, 그 아름다움은 난초 같다는 뜻인데요. 정말 멋진 말 아닌가요? 그런데 과연 금란지교가 구체적으로 어떤 우정을 말하는 걸까요? 도대체 어떤 조건들을 갖춰야 비로소 ‘참다운 우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 진정한 친구는 어떤 존재인가요?


저는 몇 가지 조건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선의와 미덕: ‘친구 좋다는 게 뭔지’ 보여줘!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의 말부터 한번 빌려볼게요. 그는 우정을 ‘선의와 호감을 곁들인 감정의 완전한 일치’라고 했어요. 우정은 선한 의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거죠. 그리고 ‘미덕’을 저버리면 우정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어려울 때 서로 도울 줄 아는 것, 이것이야말로 미덕의 시작 아닐까요? 물론 어려울 때 돕지 않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라고 부르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나의 곤경이 친구에게 ‘십자가’처럼 너무 큰 부담이 될 때, 우정은 쉽게 금이 가고 깨어지기도 해요. 우리는 친구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2. 믿음과 의리: 지옥 제일 밑바닥엔 ‘배신자’가…


친구 사이에는 무엇보다 ‘믿음’과 ‘의리’가 있어야 해요. 세상에 ‘신의를 배반하는 것’만큼 큰 악덕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테는 그의 유명한 『신곡』에서 ‘배신’을 인간의 가장 큰 악으로 규정하기도 했죠. 지옥은 아홉 개의 층으로 되어있는데,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죄가 더 무겁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밑바닥, 9층에는 가장 중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영원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데, 그곳이 바로 배신의 죄를 저지른 자들이 있는 곳이라고 해요. 한때 막역했던 친구 카이사르를 배신한 카시우스와 브루투스가 바로 그 지옥의 제일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배신의 아이콘은 되지 맙시다!


3. 공감과 이해: “아, 그랬구나!” 한마디면 충분해!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너무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서 꼬치꼬치 캐묻다 보면 감정의 앙금이 생기고 결국 서로 멀어지게 되더라고요. 저의 경험상 그랬어요. 그보다는 따뜻한 가슴으로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해 주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공감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많은 말이 필요 없어요. 친구의 말에 그저 “아, 그랬구나” 하는 반응만 보여줘도 충분할 때가 많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 친구는 ‘나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구나!’ 하는 안도감을 가지게 되고, 그 덕분에 관계는 더 좋아질 수 있거든요. 게다가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죠.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지기(知己)’라고 부르잖아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당신에게도 그런 ‘지기’가 있나요?


4. 사랑과 존경: 칸트도 인정한 ‘환상의 조합’!


친구는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만 우정이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철학자 칸트도 이렇게 말했죠.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두 가지 의무를 진다. 하나는 사랑이요, 또 하나는 존경이다. 우리는 남을 사랑하는 동시에 존경해야 한다.” 그는 우정을 “두 개의 인격이 서로 같은 사랑과 존경으로 하나로 융합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정말 멋진 정의 아닌가요? 저는 우정이란 사랑과 존경의 완벽한 조화라고 생각해요. 사랑 속에 존경을 잃지 않고, 존경 속에 사랑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우정의 조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를 사랑하고 존경하나요?


어떤가요? 키케로의 말처럼 ‘선의와 미덕’에서 시작해, 단테가 지옥 끝까지 내던진 ‘배신’의 반대편에 서는 ‘믿음과 의리’,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보듬는 ‘공감과 이해’, 마지막으로 칸트가 이야기한 ‘사랑과 존경’까지. 이렇게 여러 층위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려니 진정한 ‘금란지교’라는 게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가장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결국 사람과의 관계, 그중에서도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는 친구와의 ‘우정’이니까요. 진정한 친구 관계는 일방적인 희생이나 소유가 아니라, 서로 노력하고 가꾸어 나가는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당신은 지금, 그런 우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요?





노년의 우정, 고삐를 느슨하게 쥐어라!


“벗이 먼 데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이 말,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우정의 예찬인데, 들을 때마다 참 따뜻해지는 문장이에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먼 곳에서 찾아온 친구와 함께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참 아름답고 정겹지 않나요? 혹시 당신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나요? 특히 여유로운 노년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거예요. 인간의 우정이라는 것은 역경과 고난이라는 인생의 서리를 맞은 후에야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우정은 이익이나 명예를 초월하는, 인생에서 정말 소중하고 차원 높은 가치임이 분명합니다.


물 건너 또 물 건너, 꽃구경 또 꽃구경, 봄바람 강변길에, 어느덧 그의 집이 (渡水復渡水 看花還看花 春風江上路 不覺到君家)


중국의 시인 고계(高啓)가 호(胡)라는 은자를 찾아가는 모습을 노래한 시인데,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물을 건너고 또 건너면서, 봄바람 불어오는 강변 길을 유유자적 꽃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사랑하는 옛 친구의 집에 다다랐다는 이야기. 자연의 아름다움과 진실한 우정이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집니다. 은퇴 후에 이런 낭만과 여유를 누려본다면 새삼 세상 살맛 날 것 같지 않나요? 인생의 마지막까지 고군분투만 한다면, 그 인생은 풀 한 포기 없고 샘물 한 줄기 없는 사막처럼 되어버릴 겁니다. 당신은 어떤 노년을 꿈꾸고 있는가요?


혹시 『장자』에 나오는 이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어떤 사람이 코끝에 마치 파리 날개처럼 얇게 흰 흙을 발랐대요. 그러자 친구인 석공이 도끼날을 휘둘러 그 흰 흙만 아주 깨끗하게 깎아냈다는 겁니다. 석공이 도끼를 휘두르는 동안 흙을 바른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해요. 임금이 이 이야기를 듣고 석공을 불러서는 “재주가 좋다던데, 나에게도 한번 해 봐라!” 했답니다. 그러자 석공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제가 예전에는 할 줄 알았지요. 그러나 이제 못합니다. 흙을 발랐던 그 친구가 죽었거든요.”


『장자』 24편 서무귀(徐無鬼)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정말 대단하죠? 코끝의 얇은 칠을 도끼로 벗겨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더 어려운 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친구인 석공을 절대적으로 믿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만약 혹시라도 의심이 들어 몸을 조금이라도 움츠렸다면, 도끼날이 코나 얼굴을 다 망가뜨렸을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임금이 단지 신기하다는 이유로 코끝에 흙을 바르고 눕기라도 했다면, 그날은 석공과 임금 모두 죽는 날이 되었을 겁니다. 임금은 몸을 움직여 크게 다쳤을 것이고, 임금 몸에 도끼 자국을 낸 석공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테니까요.


이 이야기에서 석공과 친구 사이에는 정말 죽음을 뛰어넘는 ‘신뢰’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 얼마나 진지하고 엄숙한 우정인가요?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우정이 생길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해요. 노년에는 이렇게 목숨까지 걸 정도의 우정은 좀 부담스럽다고요.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이라면 또 모를까, 당신은 어떠신가요?


이제 은퇴 후 인생은 친구들과 함께 좋은 생각을 나누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함께 즐길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정말 큰 축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난 시절을 감사할 수 있고, 남은 날들에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노년이 어디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은퇴 후 노년에는 너무 끈끈하고 무거운 우정보다는, 편안하고 여유로운 우정이 더 좋습니다. 마치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쥐듯, 우정의 고삐도 너무 꽉 쥐지 말고 좀 느슨하게 쥐어보세요.” 당신도 동의하시죠?





우정의 배신을 피하는 법 … 당신의 소중한 인연을 지키는 지혜


고대 로마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는 『우정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정이란 ‘선의와 호감을 곁들인 감정의 완전한 일치’라고요.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지 않나요? 우정은 우리가 어려울 때 든든한 힘이 되어주고, 고독할 때 따뜻한 위로가 되어줍니다. 행운이 찾아왔을 때는 그 기쁨을 더 크게 빛내주고, 불운이 닥쳤을 때는 아픔을 나누어 가볍게 해주죠.


그저 존재만으로도 믿음직스럽고, 마음에 온기를 가져다주는 것, 그게 바로 우정 아닐까 싶어요. 우리 인생에서 우정을 싹둑 잘라내 버린다면, 아마 앙상한 겨울나무처럼 삭막하고 황량해지지 않을까요? 당신에게 우정은 어떤 의미인가요?


진정한 우정의 조건은 아마 ‘신뢰’와 ‘미덕’일 겁니다. 신뢰 없이는 진정한 우정을 얻을 수 없고, 미덕 없이는 우정이 오래 유지되기 어렵죠. 우정은 결코 거짓으로 꾸며대거나 이익을 바라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도 때로는 역경 때문에, 때로는 점점 힘겨워지는 삶의 무게 때문에 소중한 우정이 배신당하는 일이 생기곤 합니다.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위험이 우정 위에 마치 운명처럼 걸려 있는 것 같아요.


가장 흔하게는 ‘돈 문제’로 우정의 배신이 생겨납니다. 간혹 지위나 명예를 둘러싼 경쟁에서 비롯되기도 하고요. 배신은 가장 가깝던 친구를 한순간에 철천지원수로 만들어버리죠.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친구 때문에 소중한 재산을 모두 잃고 어렵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종종 계세요. ‘친구’라는 이유로 도와주기를 간청하니 뿌리치지 못해 당하고, 상처 입은 마음을 안고서도 이것이 마치 진정한 우정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어쩌면 좀 ‘바보 같은’ 사람들처럼 보일 수도 있죠.


자! 그럼, 한번 물어볼게요. 돈 문제로 힘들다고 해서, 인생에서 ‘우정’이라는 걸 송두리째 도려내 버려야 할까요? 미덕이 때로는 근심과 괴로움을 수반한다고 해서 미덕 그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되잖아요? 아무튼 이런 위험을 피하려면 엄청난 지혜가 필요하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정의 배신을 지혜롭게 예방할 수 있을까요?


저는 러시아 속담인 “믿으라. 그러나 확인하라(doveriyai no proveriyai, trust but verify)”는 말을 마음에 새기곤 합니다. 우정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신뢰와 미덕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친구의 말을 우선으로 ‘믿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후에는 그 말이 정말 사실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탈무드에는 심지어 “사람을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랍비처럼 존경하고 도둑처럼 의심하는 것”이라고까지 경고하고 있어요. 혹시 당신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떤 분은 “확인하려 든다면 그게 어찌 믿는 것이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믿는 것’과 ‘확인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믿음’은 순전히 주관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것인데 반하여, ‘확인’은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정보의 정확성을 평가하는 과정이니까요.


이건 직장에서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상사가 부하 직원을 믿는다고 해서 업무 처리에 필요한 자신의 도장을 함부로 맡기거나, 아이디나 패스워드를 가르쳐 줘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예요. 확인하지 않는 건 직무 태만이고 직무 유기입니다. 친구 간의 금전 거래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 친구가 빚을 갚을 능력과 의사가 정말 있는지, 혹시 나를 속이려는 건 아닌지, 우리는 신중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게다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인지도 미리 심사숙고해 봐야 하고요. 확인하지 않은 책임은 오롯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니 만약 친구로부터 부담스러운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친구의 어려운 상황에 ‘공감’해 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이런저런 상황을 차분히 ‘확인’하는 거죠. 만약 결국 거절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지금 그만한 돈을 융통할 수가 없어서…”, 또는 “가족의 허락을 받을 수 없어서…”라고 완곡하게 거절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소중한 우정이라고 해도, 결코 눈감아 줄 수 없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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