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레시피 노트 6

요리를 하다 마주한 것들

by 담으리

소불고기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 가까이에 소불고기 레시피가 있었다.

소불고기 간장 세 숟갈, 설탕 한 숟갈, 참기름, 깨, 다진 마늘, 배즙.

고기는 얇을수록 좋다. 핏물은 짧게. 센 불에서 빠르게. 오래 볶으면 질겨진다.

※ 혜원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 혜원이 힘든 날, 입맛 없을 때, 생일날, 시험 끝나는 날, 그냥 해주고 싶은 날.

※ 언젠가 혜원이한테 알려줘야지.


언젠가 혜원이한테 알려줘야지.


그 '언젠가'가 오지 않았다.

엄마는 알려주지 못했다.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둘 다 언젠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오는 것이라고. 시간은 충분한 것이라고.

하지만 충분한 줄 알았던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혜원이 힘든 날, 입맛 없을 때, 생일날, 시험 끝나는 날, 그냥 해주고 싶은 날.


나는 그 목록을 읽으면서 엄마를 생각했다.

내가 힘들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전화 한 번 했을 뿐인데 목소리에서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괜찮다고 했겠지만, 엄마는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부엌으로 갔을 것이다.


고기를 꺼내고, 배를 갈고, 간장 세 숟갈을 넣었을 것이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소불고기가 식탁에 있었던 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그냥 맛있다고 먹었는데.

나는 오래 그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일어섰다. 냉장고를 열었다. 소고기 앞다릿살이 있었다.

얇게 썰어달라고 정육점에서 사온 것이었다. 배를 갈았다. 손이 배즙으로 노래졌다.


간장 세 숟갈. 설탕 한 숟갈. 참기름, 깨, 마늘. 고기를 넣고 조물렸다.

잠깐 재웠다가 센 불에서 빠르게 볶았다.


다 됐을 때 혼자 식탁에 앉았다. 밥을 펐다. 소불고기를 한 점 집었다.


엄마 맛이었다.

완전히 같은 맛이었다.


처음으로, 만들고 나서 완전히 같았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는데, 같았다.

간장 세 숟갈, 설탕 한 숟갈, 배즙, 센 불. 엄마가 적어둔 그대로 했더니 엄마 맛이 났다.


나는 한동안 숟가락을 내려놓고 있었다.


엄마가 언젠가 알려주려고 했던 것을, 엄마가 남긴 노트로 알게 됐다.

순서가 달라졌지만, 전해졌다. 알려주려던 마음이 결국 닿았다.

노트를 통해서. 조금 돌아왔지만, 닿았다.

밥을 다 먹었다. 두 공기.


1997년의 일기에 적혀 있던 것처럼. 나는 또 두 공기를 먹었다.


설거지를 하면서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걸 만들 것이다. 혼자서. 언젠가 내 곁에 누군가가 생기면 해줄 것이다.

그 사람이 힘든 날, 입맛 없는 날, 생일날, 시험 끝나는 날, 그냥 해주고 싶은 날. 엄마가 나한테 해줬던 것처럼.

그리고 언젠가 그 사람에게 알려줄 것이다. 간장 세 숟갈, 설탕 한 숟갈, 센 불에서 빠르게. 엄마가 나한테 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게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 * *


노트는 지금 내 주방 서랍 안에 있다.

엄마 집의 같은 자리가 아니라, 내 집의 서랍. 거기 두기로 했다.

버릴 수 없었고,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곳에 두기도 싫었다.

주방 가까운 곳에 두고 싶었다. 가끔 꺼내 읽고, 따라 만들고, 다시 넣는다.

노트를 펼칠 때마다 엄마 손이 쓴 글씨가 보인다. 그 글씨가 아직 선명하다.


노트를 보면서 알게 된 건 레시피만이 아니었다.

엄마가 스물여섯에 실패한 갈비찜, 오 년 걸려 완성한 나물, 나를 위해 청양고추를 따로 넣던 습관, 내가 울던 날 저녁에 불고기를 하던 마음, 비 오는 날 부쳐줘야지 혼자 적어두던 사람. 언젠가 알려주려고 마지막 페이지 가까이에 적어뒀던 것들.


나는 엄마를 다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트 속에는 내가 모르는 엄마가 있었다.

실패하고, 고치고, 무력하게 부엌에 서서, 그래도 할 수 있는 걸 하던 사람.

나를 위해 메모를 남기고, 기억을 기록하고, 언젠가를 기다리던 사람.


그 사람을 이제야 조금 알았다.

늦었지만, 알게 됐다.

노트가 없었다면 영영 몰랐을 것들을.


오늘도 주방에 선다.

엄마가 서던 그 자리처럼.

같은 냄새가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노트를 꺼내 펼치고, 엄마가 남긴 글씨를 따라간다.

처음엔 서툴렀던 것들이 조금씩 익숙해진다. 손이 기억하기 시작한다.


부엌에서는 아직도 엄마가 느껴진다.

그게 오래 남으면 좋겠다.

내 손이 이 레시피를 외울 만큼 익숙해진 뒤에도.

노트 없이도 만들 수 있게 된 뒤에도. 엄마가 부엌에 서서 나를 생각하던 그 마음만큼은, 오래 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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