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고재비 남편은 아이들 방학을 헛되이 보낼게 둘 순 없었다. 그건 나에게 죄악이다. 나는 육아휴직 중이고 아내는 마침 아이들 방학 기간에 출근을 해야 했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아쉬웠지만 나에겐 완벽한 조건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누가 봐도 폭염 속 8월 초 주말 포함 9일이다. 산고와 비댈 순 없겠지만 매년 겪는 폭염의 더위 따위야 여행의 달콤함에 잊은지 오래다. 몇 주 전부터 어딜 가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런 고민들은 내 일상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처음엔 주변 자연휴양림이나 국립공원 야영장에서 캠핑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 고민은 점점 산으로 가 국내, 해외 비행기 표를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몇 가지로 안을 좁혀 보았다.
1. 지리산 노고단에서 일출 보기
2. 내일로 기차여행하기
3. 울릉도, 독도 여행하기
4. 제주도 한라산 등반 및 여행
이쯤에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과연 나를 위한 여행인가? 아이들을 위한 여행인가? 생각 끝에 난 결론은 '그래 맞다 맞아. 이건 나의 행복을 빙자한 아이들의 위한 여행이다.' 아이들의 성장과 나의 행복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여행이길 바랐다.
생각했던 몇 가지 안들을 가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일로 기차여행을 하며 경상도 동해, 전라도 남해, 충청도 서해를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생각했다. 하지만 기차로만 다니기에는 제약이 너무 많았고 경상도 쪽은 아이들이 비교적 여행 간 곳이 많았다. 그래서 노고단 일출도 볼 겸 전라도로 배낭여행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여행 관련 책들
아이들과 기차여행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재밌겠지? 신나겠지?' 꼬셔보니 홀딱 넘어왔다.
"아빠랑 배낭여행 갈 거야!"
여행을 준비하며 기차여행이나 각종 여행 관련 그림책들을 빌려와 아이들과 읽었다. 가봤던 곳도 있었고 가보고 싶었던 곳도 있었고 전혀 몰랐던 곳도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여행 관련 그림책을 읽으며 어딜 갈지 무엇을 할지 고민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일차 목포, 신안 소금박물관
세종 할머니 댁에서 여행은 시작되었다.
큰 배낭을 짊어진 아빠와 아들 둘, 할머니는 걱정 또 걱정이다. 할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오송역에 내렸다.
평일에 시작된 여행, 아침 7시, 다들 직장으로 출근하는 듯한 차림의 사람들이 가득한 기차역에 큰 배낭을 멘 세 남자가 있다. 이질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뿌듯하기도 했다.
아직까지 아이들은 신이 나있다. 일단 여행을 간다는 것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설레는 것이다. 다만 그곳까지 가는데 어떠한 역경이 남아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하기엔 아직 아이들이 어린것일까...
빙고, 스무고개게임용 수첩 // 1일 1영어 학습지
오송에서 목포행 기차를 타고 서로 마주 보며 엄마와 약속한 1일 1영어 학습지 미션도 수행했다. 이번 여행의 허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수첩과 연필 그리고 영어학습지이다. 이번 여행을 다니며 아이들에게 손선풍기와 수첩을 하나씩 사주었다.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 여행이니 만큼 휴대폰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스무고개나 빙고게임을 하면서 가겠다고 하여 아내는 선듯허락을 해주었다.
광주를 지나 목표에 도착했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신안 증도에 있는 소금박물관이다.
드넓은 염전과 소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몸소 보여주고 싶었다. 자차를 이용해도 먼 거리이다. 목포역에 도착한 우리는 목포종합버스터미널로 시내버스를 이동하고 터미널에서 신안 지도행 시외버스를 타고 지도에서 증도로 마을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중간에 지도터미널 근처 중국집에서 점심도 해결했다.
"아빠 왜 소금박물관에서 바로 내리면 되잖아! 버스를 왜 여러 번 타야 되는 거야!"
둘째가 물었다. "어... 어..."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태어나고 지금까지 놀러가거나 할머니댁을 갈 때 항상 자차를 이용하거나 도시로의 여행에는 기차 한 번, 버스 한 번이면 보통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기차 1회, 버스 3회를 탑승해 출발한 지 7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으니 그것도 배낭도 질머지고, 세상 물정 모르는 둘째 눈에는 이상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둘째의 물음에 미안하면서도 왠지 모를 흐뭇함이 느껴졌다. 아이들에게 작은 결핍이 성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행 내내 힘듦을 아이들의 성장에 발판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미안)
결국 지처 잠들어버린 아이들
목포에서 지도, 지도에서 증도로 점점 가면 갈수록 버스에는 사람이 없다. 결국 마지막 버스에서는 우리 아이들과 나, 그리고 기사님 네 명만이 버스를 타고 달렸다. 기사님은 배낭을 메고 온 우리가 신기했는지 말을 먼저 걸어오셨고, 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다음날 타고 나갈 버스나 음식점, 샤워할 만한 곳 등을 여쭤보았다.
원래 처음에는 증도면사무소 뒷산에 상정봉이나 증도낙조전망대에서 텐트를 치고 자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더운 날씨에 샤워설이 있어야 할 것 같아 기사님과 얘기해 보고 우전해수욕장에서 야영을 하기로 결정했다.
소금향 카페
소금박물관 맡은 편에는 소금향카페가 자리 잡고 있다. 흔한 커피 그리고 유명한 소금 아이스크림을 판매한다. 또한 소금 관련 스파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도 다들 먹어보는 소금 아이스크림으로 목을 축였다. 그냥 짠 아이스크림이다. 블루베리, 계피 등 선택하면 위에 가루를 뿌려주신다.
소금박물관과 소금향카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자가용을 이용한 여행객에게는 단지 조금 동떨어진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버스를 이용해야 하는 우리들에겐 큰 장벽과도 같았다. 나가는 버스를 놓치면 3,4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페 주인분께 택시 기사님 연락처도 받아 놓고, 소금 박물관 염전 체험전에 버스시간을 알려드리고 그전에 체험을 끝날 수 있도록 부탁을 드렸다.
증발지에서 대파 체험
처음 강의실 같은 곳에서 천일염을 만드는 과정을 쉽게 설명해 주셨다. 나는 염전에 바로 바닷물을 넣고 그냥 기다리면 소금이 만들어지는 줄 알았다. 따로 염도를 높이기 위해 물을 저장하고, 그 물을 우리가 흔히 아는 염전인 증발지로 수차를 돌려 채워놓고 증발지에서 증발되어 소금이 만들어지면 대파라는 밀대도구를 이용해 소금을 모은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금을 저장해 물을 뺀다고 한다. 우리는 수많은 과정 중 처음으로 증발지에서 대파라는 도구로 소금을 모으는 체험을 하였다.
다 똑같은 소금인 줄 알았는데 얼마나 염도 높은 소금물을 만들어서 증발지에 제공하는지가 소금의 질을 좌우하는 요소라고 했다.
체험은 우리 가족 제외 4팀이 더 있었다. 대부분 초등학생 정도되어 보이는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었다. 증발지 한 칸에 물이 증발되고 남아 있는 흩어진 소금을 대파로 모으는 작업은 힘들지만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아이들도 좋아했다. 수확의 기쁨을 느꼈을까? 불과 10분이 채 되지 않아 작은 소금 동산이 만들어졌다.
수차 체험
다음 체험은 수차 체험이다. 이 수차를 이용해 저장된 소금물을 증발지로 이동시킨다. 요즘은 전동펌프를 이용한다고 한다. 그래도 염전하면 떠오르는 것 중에 하나가 이 수차 아닐까?
하지만 작은 아이들이 체험을 하기에는 다소 위험하기도 해 보였다. 왜냐하면 수차 상단에 있는 손잡이 같은 막대를 놓치게 되면 그대로 수차 밑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충분히 설명하고 시범을 보여주시고 아이들이 제법 의젓하게 체험에 임했다. 예전에 전동펌프가 없을 때 얼마나 고된 노동이었을까 생각되었다.
이렇게 체험을 마치고 인원수 별로 소금을 나눠주셨는데 우리는 배낭 무게 때문에 하나만 챙겨 왔다. 나중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르겠다.
소금아이스크림 판매점
소금박물관 주변에는 소금향카페 말고도 바로 건너에 소금아이스크림 판매점이 따로 있다. 우리는 소금박물관에서 받은 쿠폰으로 아이스크림을 또 먹었다. 그곳에는 아주머니 두 분이 계셨는데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기특하다. 대단하다는 칭찬도 아끼지 않아 아이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런데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드시던 중년의 부부가 계셨는데 우리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용돈을 주셨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손주들 생각이 나신다며 더운데 아이들 맛있는 걸 사맥이라신다. 가시는 뒤꽁무니에까지 고개 숙여 인사드렸다. 그렇게 떠나시고 생각해보니 아이들 응원 겸 이 더운 날 여행하는 무책임한 아빠의 질타 겸 용돈을 주신건 아닐까 생각도 반성도 해보았다.
증도 시골 버스
우리를 다시 지도로 데려다줄 버스가 도착했다. 손님은 우리 가족 셋이 전부다. 처음 계획은 해수욕장에서 텐트 치고 야영을 계획했지만 첫날 긴 이동으로 피곤한 아이들을 위해 목포로 돌아가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기사님께 여쭤보니 지도에서 목포로 가는 시외버스가 없단다. 네이버에서 검색했을 땐 17시 넘어서 버스가 있었는데 실제로는 운행을 하지 않는단다.
기사님께서 지도에서 무안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무안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목포 무지개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만 무안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목포역에 무사히 도착했다. 오는 내내 어찌나 거세게 소나기가 내리는지 야영을 했으면 안 그래도 피곤했을텐데 첫날부터 고된 신고식을 치를 뻔했다. 그래도 목포에 도착해 무지개를 보니 오늘 우리에게 고생했다고 수고했다고 누군가가 얘기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따듯해졌다.
수다방게스트하우스
무안에서 목포로 오며 검색의 검색 끝에 선택한 수다방게스트하우스,
가족실에 화장실과 욕실이 딸려 있어 선택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아주 밝고 친절하셔서 오늘 하루 피곤이 가시는 듯했다. 아이들과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처음으로 묵는 것이었는데 아이들이 의외로 좋아했다. 같은 여행자들과 같은 공용공간을 이용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처음에는 어색해하더니 불과 몇 분 만에 서스름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니 게스트하우스의 숙박이 아주 탁원한 선택이었다.
근처 치킨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빙고게임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들은 게스트하우스 거실 공간을 참 좋아했다. 제주도로 여행하시는 어떤 아저씨에게 간식도 드리고 이야기도 나눴다. 다음에 게스트하우스에 가면 공용 주방을 이용해 봐야겠다.
첫날을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무모했던 계획이라고 생각된다. 폭염 문자를 하루에도 몇 통을 받았는지... 장모님께 전화가와 어찌나 혼이 났는지... 애들 잡는다고...
그래도 아이들이 씩씩하게 따라와 주고 처음엔 이해되지 않던 것들(왜 버스가 소금박물관으로 바로 가지 않냐는...)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줘서 감사하다.
내가 어릴 때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어쩜 어린 시절 작은 결핍들에서 왔던 그런 당연한 것들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불편함 혹은 힘듦으로 느껴질 만한 것들이 많다. 버스를 기다린다거나, 한 끼 굶는다거나, 내가 먹고 싶은 반찬 없이 식사를 한다거나, 에어컨 없이 한여름 밤을 보낸다거나 하는 것들..
예방주사처럼 이런 결핍들을 아이들에게 조금씩 노출하는 것이 아이들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더 큰 힘듦이나 불편함에 면역을 부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