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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by 윤부파파

왜일까? 결혼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하니 어머니가 생각난다.


2015년 10월 3일 개천절에 나는 장가를 갔다. 운이 좋게도 2014년에 졸업과 함께 학교에서 근무를 했다. 타 지역에 발령을 받아 자취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당시 나의 씀씀이는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저축은커녕 매달 카드값이 막기 급급했다. 식비나 술값, 사치품을 사는데 모든 월급을 탕진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이 빈털터리로 장가를 갔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친구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장가를 갔다. 27살에 장가를 갔으니 요즘으로 치면 좀 이르긴 하다. 철이 들기도 전에 장가를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식 당일 처가 식구들 버스를 대절했었는데 나는 버스비 결제와 예약만 했을 뿐 다른 건 신경도 쓰질 못했다. 아마 어머니가 떡이며 음식을 준비해 보내셨을 것이다.


결혼식 전날까지 잔뜩 술에 취해 새벽에 돌아온 아들을 보며 얼마나 걱정을 하셨을까, 또 얼마나 애가 타게 밤을 보내셨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가슴이 아려온다.


결혼 몇 년 후의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나에게 지나가는 말로 본인은 용돈도 못 받아보고 내가 바로 장가를 가서 서운하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5살 때 돌아가시고 누나와 나, 어머니와 할머님 넷이서 살았다. 아마 어머니는 정말 치열하고 처절하게 살아오셨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흔한 아르바이트도 해본 적이 없다. 취업 전까지 어머니에게 용돈을 받아쓰고 취업해서는 먹고 싸는데 돈을 다 쓰더니 팽하고 장가를 가버렸으니 어머니께서도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아내는 그 당시 나와의 연애를 상당히 조심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는 혼기가 꽉 찼었고 나는 갓 졸업하고 온 철부지로 보였을 것이 뻔했다.

몇 개월을 만나고 어머니께 연애 얘기를 했고 나이 이야기도 하니 어머니께서 티는 내지 않으셨지만 많이 걱정을 하셨다.

처음 집에 아내와 인사하러 갔던 날, 그때 고모와 함께 넷이서 집에서 봤는데 어머니는 걱정과는 달리 아내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어머니, 고모, 아내 셋이 이야기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까지 했었다. 아내도 나름 많은 걱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고모님도 아직 그때 기억이 나시는지 아내를 볼 때마다 '질부, 질부' 하시며 눈물을 훔치신다.


아직도 철없는 아버지이자 아들이다. 그래도 이제 나도 아버지가 되었다고 나의 어머니가 새롭게 보인다. 이제 예전처럼 어머니에게 짜증도 내지 않는다. 어머니가 궁금해하신다거나 말 귀를 잘 못 알아들으시거나 할 때도 차근차근 설명하게 되고 기다려드리게 된다. 예전보다 훨씬 어머니에게 전화드리고 사소한 일상을 나누게 되었다.


아마 올해가 가기 전 누나가 시집을 갈 것 같다. 그럼 어머니는 큰 집에 홀로 사시게 될 것이다. 예전 같지 않은 어머니...


결혼하니 어머니가 생각난다. 이제 흰머리를 뽑아 드릴 수도 없는, 검정 머리카락 보다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은, 어머니라고 불리기보다는 이제는 할머니라고 더 많이 불리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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