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그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네가 가장 편해 보여.'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고, 삶의 중반 즈음을 걷고 있다. 이 즈음에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한 번씩 쳐다보게 되는데, 그럴 때 듣게 되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웃어넘겼다. 나에게서 편안함이 느껴지는 게 좋다 생각했으니까.
이 말의 묘한 무게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살고 있는 거잖아.'
'제일 상팔자지. 집에서 애들만 보면 되고. 아휴. 정말. 부럽다. 부러워.'
부러운 감정에 짝꿍처럼 '질투'가 쫓아다닌다는 걸 깜빡했다. 나를 좋게 봐주어서 감사하다 생각했는데, 그들이 정작 말하고 싶었던 건 질투였던 것이다.
팩트로 따지자면, 그들의 말대로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하는 게 맞다. 결혼 후 육아와 가사에만 전념한 전업주부였으니까.
그럼에도 그들의 질투가 속상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살아왔던 전업주부로써의 시간들이 너무 가볍게 평가되는 것 같았다. 남편만큼이나 가정 안에서 최선을 다했던 나의 노력이 작디작은 티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슬프지만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었다.
들었던 이야기를 귀에서 빼내,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오래전부터 해오던 생각이 불쑥 튀어 올랐다. 나이 앞자리가 바뀌면서 점점 간절해지던 생각이었다.
'곱게 늙었으면.'
세월에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이 아니라, 온화한 미소가 있는 얼굴로 늙어가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백발을 숨기지 않고, 주름진 얼굴을 두꺼운 화장으로 가리지 않으면서, 따뜻한 말과 위로의 손짓을 나눌 수 있고, 내가 나를 잃지 않는. 솔직히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쓰디쓴 고난에 지쳐 절망을 코 앞에서 마주할 때마다, 불가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을 뒤집어보니 소망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얼굴이고, 얼굴에 편안함이 묻어난다면 나의 바람대로 곱게 늙어가는 첫 단계일 테니까. 덕분에 몰아치던 감정은 아주 쉽게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는 건, 그만큼의 질투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늘 조심스럽다. 아직 부러움이나 질투를 받아 내기에는 내공이 부족하다. 부족한 부분을 꽉꽉 채워,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내 삶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날이 오길. 나를 깊이 인정하며 질투 없이 부러워해주는 이들이 곁에 있어주길. 그날을 상상하며 싱긋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