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잡담

생각을 바꾸면

by 모니카

남편에게 위기가 닥쳤다. 20여 년 넘게 해 왔던 일이었는데,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실수로 현장에서 아예 배제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 책임을 지고자, 현장에서 벗어났지만. 돌아가는 현장 상황을 듣는 남편의 심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보였다. 늘어가는 한숨에, 굳은 표정. 무슨 말에도 시큰둥한 태도가 이어졌다. 아이들도 남편의 위기를 느낀 모양인지, 아빠 곁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나가자. 오랜만에 우리 가족 외출 좀 하자."


온종일 TV에만 집중한 채 우울모드에 들어선 남편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딱히 외출할 일도 없고, 외출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바람이라도 쐬어야 한다는 생각에 외출을 재촉한 것이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무심히 물어온다.


"어디 갈까?"


솔직히 가고 싶은 곳이 없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남편이 곧장 차에서 내려 다시 우울모드에 재돌입 할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 뭐 먹으러 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맛있는 거."


활짝 웃으며 애교스럽게 말은 했지만, 난 정말 애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줄곧 애교라는 단어와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무표정한 남편을 향한 애교라니, 아마 남편도 내가 애를 쓰고 있음을 알지 않았을까 싶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내 눈은 남편에게 가 있었다. 두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아빠를 찾아내는 통에 정신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그 바람에 엊그제 일어난 위기를 잠시 잊은 것 같기도 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 이런 시간을 늘려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남편, 아이들 개학하기 전에 2박 3일이라도 여행 갈까?"


뜬금없는 계획이었다. 올해 여름방학은 코로나로 너무 짧아진 데다, 아이들의 학원스케줄이 만만치 않아 가족여행을 포기한 상태였다. 아이들 역시, 보강이 더 싫다며 가족여행은 나중에 가자 했었다. 남편도 여름을 너머 가을까지 쭈~욱 회사 일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남편도 바쁘고, 아이들도 바쁜데 굳이 여행을 갈 이유가 없었다. 그야말로 즉흥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갑자기? 어디로?"

"어디든. 2박 3일 정도는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마치 이미 계획했던 것처럼, 아주 여유롭게 이야기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여름 성수기에, 여행비용이 가장 비싼 이 시기에, 무작정 여행이라니. 비용도 비용이지만, 숙소가 잡힐까 걱정스러웠다.


"그래. 가."


내가 하는 일에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는 남편의 성격상, 이미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끊임없이 검색하고 검색했다. 저렴하면서 좋은 숙소. 기왕이면 여름이니 바닷가였으면 싶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수영장이 있었으면 하는. 휴가의 절정이었던 8월 중순이었다. 바닷가 숙소들은 이미 예약 마감된 상태였고, 바닷가가 아니어도 수영장이 있는 곳들은 찾으래야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놓지 못한 검색의 손동작은 새벽 2시쯤, 괜찮은 숙소를 발견하고 환호했다. 2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예약, 결제버튼을 연이어 눌렀다.




갑작스런 일정으로 떠나게 된 여행이었지만 푸른 산과 청록색 바다를 보니 좋았다. 서쪽인 우리 집과 다르게 동해의 더위는 어느새 선선해지는 가을바람과 섞여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숙소는 설악산을 바라보는 곳에 위치해 있었고, 주변은 온통 논이었다. 돌아보는 곳마다 초록이고, 세상의 소음과는 거리가 있다 보니 절로 명상이 되는 것 같았다. 남편의 미간에 잔뜩 잡혀있던 주름도 자연을 보니 조금은 펴지는 것 같아 보였다.


"우리 저녁에는 킹크랩 먹으러 갈까?"

"킹크랩?"


킹크랩에 놀라는 남편 반응이, 그의 생각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 가족의 경제적 상황은 좋지 않았다. 거의 매일이 위기였고, 거의 매일이 좌절이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최악을 상상하며 보냈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을 보내고 난 후, 남편은 모든 시간에 최선을 다했고, 잠시라도 쉬게 되면 그때의 위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먹자. 킹크랩. 오랜만에 가족여행인데, 그 정도는 먹어줘야지."


다시 한번 활짝 웃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킹크랩에 놀라지 않아도 되고, 당신이 가진 불안감을 버려도 된다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태도에 걱정이 없어서인지, 아이들의 밝은 웃음이 이어져서인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더 이상의 반대 없이 저녁메뉴 결정에 동의했다.


그날 저녁, 모닥불을 피워놓고 남편과 대화를 나눴다. 나의 예상대로 남편은 자신의 실수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경제적 부분에 대한 불안감 역시 크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괜히 실수해서. 일이 참. 미안해."

"난 너무 좋은데. 너무 더울 때 일하는 거 걱정스러웠거든. 덕분에 아이들하고 이렇게 가족여행 와서 좋고. 아이들도 아빠가 있으니까 더 좋아하잖아."


실제로 아이들은 남편까지 동행한 가족여행에 2배는 더 신나 보였다. 엄마는 늘 안 된다 하는 것들도, 아빠는 기분 좋게 오케이를 해주니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늘 피곤해하던 아빠가 아닌, 곁에 있어주는 아빠가 그리웠던 것처럼, 아이들은 여행 내내 아빠를 애타게 찾았다.


"아빠. 나 마시멜로 구워 먹을래."

"그래."

"아빠. 나도 해볼래."

"그래. 이쪽으로 와서 해 봐."


대화 중간 불쑥 끼어드는 아이들의 부탁에도 남편은 망설임이 없었다. 귀찮을 법한 아이들의 도움 요청에 밝게 웃는 남편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위기가 닥치고, 처음으로 남편의 표정이 가장 편안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정말 좋다. 정말 행복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상상할 수 없던 남편의 반응이었다. 일에서만큼은 늘 최선을 다해왔던 사람이었지만, 그도 사람이라서 벌어진 실수였다. 실수로 인한 책임은 컸지만, 그 책임으로 인해 이렇게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된 것에, 차라리 잘 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안 좋은 일의 끝에 좋은 일이 따라온다고. 오랜만에 남편이 가족의 얼굴을 온전히 보던 그날, 밤하늘의 별이 무수히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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