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정류장

반대편 정류장_1

by 수지에몽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다.

'MBTI가 뭐예요?' 혹은 '누구님 T 예요?'

100% 맞다고 얘기할 수 없지만

혈액형보단 디테일하게 사람의 성향을

구분 지어 놓아 낯선 이에 대한

사용 설명서 같은 느낌이 들어

MBTI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신뢰하고 있지는 않았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동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반대편 정류장을 만나고 MBTI라는 것이 굉장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날씨와 나의 기분을 반영하여 오늘의 노래와 옷을 정한다.

2월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햇살은 따뜻했고,

바람은 상반되게 차디찬 날이라

달콤한 가사에 그렇지 못한 끈적, 쫀득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Leon Thomas - mutt과 귀여우면서 힙한 베이프 박스티를 골랐다.

그렇게 나의 픽은 인스타그램에 공유되고,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일하다 발견한 폰에는 '누구지?'라는 물음표 가득한 낯선 존재에게서 연락이 와있었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그간 올린 나의 플레이리스트들을 인상 깊게 보고 들었다며,

음악 취향이 잘 맞는다면서 다가 온 반대편 정류장.


음악적으로 소통이 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기에 경계태세를 갖출 새도 없이 며칠을 신나게 떠들어댔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든 날이면 아쉬움에 아침부터 볼 맨 소리를 하며

오늘은 잠을 참고 더 이야기하자고 했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플레이리스트 공유를 시작으로 내 마음의 공간도 공유를 해주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랜선으로 나에게 접촉하는 남자들은 오프라인 만남에 목을 매곤 했는데,

반대편 정류장은 모든 게 달랐다.

여태 다가왔던, 지나갔던 사람들... 그리고 나와도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그 차분하고 안정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어 끌리게 된 것 같다.


화이트데이, 저녁이 되어서야 늦게 온 연락에는 사탕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나는 직원 식당에서 주방이모님께 받은 컨츄리 한 알사탕 세알이 전부라고 속상하다고 칭얼거리고 있었고,

오늘이 맞는지,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건지,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낸 뒤 선물을 주겠다며

연락처를 물었고 나는 드디어? 라며 기쁨의 브레이크 댄스를 췄다.


울린 알람 속 선물은 사탕이 아니었다.

유명한 홍콩 쿠키였다.

여태 먹어 본 쿠키 중에 제일 맛있었다며, 나도 좋아할 거라고 했다.

그간 내가 말한 나의 입맛도 반영이 되어있었고,

아기자기하고 쓸모는 없지만 귀여움으로 중무장한 잡동사니를 쓸어 모으는 취향까지 반영되어 있었다.

연인이 아닌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에 대해 데이터를 차곡차곡 모아서

선물에 마음을 담아 줬다니...

텍스트로 담을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었다.


새벽 시간이었지만 창문 열고 동네방네 소리치며 자랑하고 싶었다.

현실에서는 침대 위를 방방 뛰어다니며 무음으로 꺅꺅 소리치는 게 전부였지만...


화이트데이를 기점으로 우리는 드디어 인스타그램 디엠을 벗어나

카카오톡으로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침인사부터 서로의 점심을 챙기고

체중이 전부 눈두덩이로 간 듯 폭력적인 무게를 자랑할 때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집중하기 바빴다.

하루가 벌써 끝나버렸다는 게 아쉬웠다.


종종 사막보다 건조하게 오는 단답에 내 기분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내가 할 말 없게 한건 아닌지,

대화가 재미없는 건지,

대화로 하는 테니스를 이따위로 하면 어쩌자는 건지,

짜증이 나서 콱 씹어버릴까 하다가도 입꼬리는 광대에 닿은 채 답장을 쓰고 있었다.

대화가 이대로 끝나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한 달이 다되어 갈 때 즈음, 만남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신중하게 만나길래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나 싶었다.

퇴근 후에 봐야 해서 꾸밀 수 없으니 편한 게 보자며 거듭 가벼운 만남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나는 싫었다.


나는 내 멋에 취해 사는 폼생폼사인 데다가,

연인이 될지, 오랜 친구로 남을지 모르는 상대를 편하게 보다니?

진정한 꾸안꾸 패션이 뭔지 보여주지!라는 마음으로 뭘 입어야 할지 이틀을 고민했다.

날씨도 나의 기분도 반영할 수 없었다.

꾸미고 오면 너무 부담스럽다며 부담이라는 단어를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의아했다.


너도 나한테 조금의 호감이 있다면 여벌 옷을 출근길에 챙겨가서

만나러 오기 전에 갈아입는 노력은 왜 하지 못할까?

아직 내가 그 정도는 아닌가?

인간관계에도 노력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걸 정녕 모르는 거야?

시곗바늘은 만남에 도착했고,

나는 꾸안꾸의 정석, 흰 티에 청바지 차림이었고

내 앞은 누가 봐도 일하다 온 사람 같았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걸맞은 셔츠에 슬랙스, 후리스 깊게 찔러 넣은 주먹까지 완벽했다.

흡사 주방장이 앞치마와 조리모를 쓴 채로 퇴근하고 데이트하는 모습 아닌가?


기대하진 않았지만 서운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첫 만남에서부터 잘 보이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것은 공식이었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한 마음으로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토요일 밤이라 분명 조용한 선술집 콘셉트인 곳인데도 시끌벅적했다.

나에게 술집에서 이 정도 소음이면 도서관이었지만,

내 앞은 미간에 주름이 점차 많아지며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메뉴를 시키기도 전에 한 말은 '기 빨린다'였다.


맙소사...


난 아직 고주파 하이텐션 빔을 쏘지도 않았는데?

상태 체크를 끝내고 빠르게 술병을 비워나가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멋쩍게 웃던 입꼬리는 어느새 어금니가 보이도록 개방되어 있었다.

역시 술의 힘은 대단했다.

이야기는 끝을 몰랐고 우리의 체력도 방전날 줄 모르고 달렸다.

술이 술술 들어가던 중 나는 직진하기로 했다.

교통정리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친구로 남을지, 연인으로 발전할지.


만나자고 용기는 네가 냈으니 이번엔 내가 용기 낼 게.

너 나 좋아하지? 나한테 관심 있지? 많지?

다시 입꼬리로만 웃기 시작했다.

빨리 답하라는 내 눈빛을 겨우 읽었는지

앞자리에 앉은 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응'이라고 답했다.

명 짧은 놈은 이미 죽고 다시 태어났을 시간이다.

그래 오케이 나도 좋아 그럼 뭘 고민해 너 나 좋아 나 너 좋아 사귀자 만나자

왜 말을 안 해 언제 할 생각이었어 빨리빨리 정해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내가 토하듯 쏟아낸 말들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친구도 연인도 아닌 사이로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시간이 길어지는 게 싫었다.

다시금 어금니까지 보이도록 크게 웃어 보이며 좋다고 말해주었다.

밤과 술 그리고 설렘으로 시작하는 연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