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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 속삭임 Jun 14. 2024

여덟. 꽃뱀과 자라

뱀은 생각보다 느렸고 자라는 생각보다 빨랐다

날씨가 점차 더워지고, 해는 점점 길어지고 있다. 하지가 지나면 아주 조금씩 해는 짧아지겠지만, 어쨌든 어느새 여름이 다 되었다. 아직 6월 중순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여름처럼 기온은 올라가고 습한, 전형적인 우리나라 여름 날씨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해질 무렵부터는 바람이 조금은 서늘하게 불어온다는 것. 가끔씩은 매일 산책 나가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다. 딱 오늘이 그랬다. 그래도 집에 오니 습관처럼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이어폰을 걸고 모자를 쓴 후 자연스레 집을 나선다. 걸어가는 길에도 여름은 깊었다. 하천 변을 덮고 있던 큰금계국은 이미 져버린 지 오래되었다. 큰금계국은 핑크뮬리와 함께 유해성 2등급 식물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큰금계국을 생태교란종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한다. 꽃이 노랗게 지천으로 피어있을 때 예쁘다는 생각만 했지 이 식물의 위해성을 생각하지는 못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늦봄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었던 큰금계국. 시에서도 그러한 비판을 들었었던지 어느 순간 큰금계국이 제거되고 있었다. 여러해살이 풀이라 내년에 또 그렇게 꽃이 피어나겠지만. 큰금계국이 피어났었던 둑의 반대편으로는 모내기가 끝난 논에서는 벼가 파랗게 자라나고 있었고, 그 논 주변의 작은 밭에는 상추, 깨, 땅콩, 깻잎 같은 작물이, 비탈에는 호박 덩굴과 고추가 단정하게 심어져 있었다. 아마 이 논밭의 주인은 정말 부지런한 사람인 모양이다.

군데군데 보이던 강태공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어딘가에 숨어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눈에 띄는 하천변에서 낚시를 하다가 신고가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갈대숲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낚싯대를 펼쳐놓고 있었다. 궁금한 것이, 그들은 저 물고기를 잡아서 무엇을 할까. 옛날 같으면 매운탕을 끓여 먹는다지만, 요즘에 굳이 도심 하천에서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먹는 일을 할까? 아마도 재미로, 그리고 스포츠의 일종으로 낚시를 즐긴다고는 하지만 뭔가 씁쓸한 것은 사실이다. 바다낚시도 마찬가지일까? 나의 관심사가 아니니 내가 뭐라 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수달이 살고 있으니 낚시를 삼가 주세요'라는 팻말을 보고도 버젓이 낚시를 즐기는 것이 과연 괜찮은 걸까.

여느 때처럼 산책길에 들어서니,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사람들끼리 만나 길 한복판에서 수다를 떨고 있다. 개들이 비교적 잘 교육받은 편이라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징검다리를 건너 반대편 산책길에 들어서서 걷고 있는데 한참 앞에 기다란 끈이 놓여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워질수록 그 끈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뱀! 연두색과 갈색, 얼핏 보면 화려한 색이 섞인 약 1 m 정도의 뱀이 하천가로 내려가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사진은 찍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뱀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꽃뱀이라 불리는 유혈목이란다. 꽃뱀이라 불릴 만큼 색은 예뻤다. 밝은 연두색에 주황색 무늬가 섞인 예쁜 뱀. 그러나 유혈목이도 독사다. 독니가 앞니가 아닌 목구멍 근처 안쪽 어금니라서 큰 동물은 깊게 물 수 없는 탓에 독이 없는 뱀으로 생각되었지만, 일본에서 이 뱀에 물려 중학생이 사망하면서 독사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어쨌든 그 꽃뱀은 유유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하천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뱀은 생각보다 느렸다. 그 모습을 나와 함께 보시던 아주머니께서 '여기 뱀 많아'라고 시크하게 내뱉으시고는 가시던 길을 가셨다. 개를 피해 이 길로 왔더니 이번엔 뱀이라니! 다시 징검다리를 건너 반대편 산책길로 간다. 아까 그 길로 가면, 그쪽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반려견을 산책시키려 나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산책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저쪽보다는 이쪽이 공간이 좁은 편이라 뱀의 출현도 그리 잦지 않다.

오늘은 멀리 위치한 저수지까지 가보기로 했다. 이미 두 번을 다녀온 그 저수지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인접한 도시의 경계에 있다. 하천을 따라 계속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는 잘 가꾼 밭에서 각종 작물들이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농부가 양파를 캐셨는지 나란히 몇 줄로 양파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하천 변이라 물을  끌어올려 쓰기도 좋고 볕도 적당히 들고 하니 이곳에서의 농사는 꽤 쏠쏠한 모양이다.

반대편에서 모녀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었고, 나는 저수지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앞으로 커다란 둥근 물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모녀 중 딸이 갑자기 탄성을 질렀는데, 그 둥그런 물체는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새로운 동물들을 만나기로 되어있었던 것일까. 그 둥그런 물체는 자라였다. 그래서 속담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고 했던 모양이다. 멀리서 보니 진짜 솥뚜껑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제대로 보지는 않았지만, 산책길을 가로질러 가는 자라의 발걸음은 매우 재빨랐다. 거북이와 달리 자라의 걸음은 꽤 빠른 편이었다. 거북이와 다르게 부드러운 등딱지를 지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가서 찍기도 전에 자라는 이미  아래 풀숲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내 기억 속의 자라는 종조모님 댁에서 본 것이었다. 아마도 오촌 숙부가 강에서 잡아온 모양이었는데, 작은 독 안의 깨끗한 물에 누르스름한 생명체가 있었다. 그 작은 독에서 뾰족한 코를 밖으로 내어 숨을 쉬는 모습이 독특했던 그 자라는 아마도 그 당시 누군가의 보양식이 되었지 않을까 싶다. 지금도 자라를 검색해 보면 요리 재료로 양식되고 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 만난 저 재빠른 자라는 양식된 것이 아니라 야생에서 살아가는 녀석인 듯했다. 좀 전에 뱀을 보았을 때 '여기 뱀 많아'라며 시크하게 지나가신 아주머니처럼, 내 옆을 지나쳐 가시던 아저씨가 그 아주머니처럼 시크하게 한 마디하고 가신다. '여기 자라 많아요. 날씨 좋으면 돌 위에 쉬는 애들도 있지'하고.

어느덧 저수지 근처에 도착했다. 저수지 부근의 무논은 이제 모내기가 끝나서 파릇파릇한 벼가 자라기 시작했고, 저수지 비탈은 덤불 식물로 덮여가고 있었는데, 하얗게 피어난 꽃이 찔레꽃을 닮았다. 어쩌면 찔레 덩굴이 저수지 비탈에 누워 덮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수지 둑에 도착하니 해는 다 졌고 노을만 가득하다. 낮의 더위는 느껴지지 않고 저수지를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왔다. 저수지 둑 위에서 돌아보니 내가 온 거리가 제법 되는 것이 느껴졌다. 둑 위에서 한숨을 돌렸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 오늘 하도 새로운 생명체들을 보아서인지 이번엔 또 어떤 동물이 나타날까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길을 걸었다. 다행히 어떤 동물도 나타나지 않고 조용히 산책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저수지까지 다녀오면 당연히 이십 리는 훌쩍 넘는다. 어느새 어두워지고 있었고, 집 근처에 오니 도로마다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보통 집으로 들어올 때 9층을 계단을 통해 걸어오곤 했지만, 오늘은 걸은 거리도 꽤 되고 하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으로 마무리.

늘 그렇듯이 오트밀을 타고 낫또와 바나나에 참외 하나를 곁들였다. 조금 늦은 저녁이긴 하지만 괜찮다. 오늘 하루는 충분히 걸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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