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잡다한 생각 잔치
대화가 없으니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기에 좋다
직장에서 소통의 문제로 사소한 오해가 있었다. 아, 물론 그 오해는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았고 단지 나의 발품이 조금 늘었을 뿐이다. 상대방이 A라고 얘기한 것을 B로 들은 나도 잘못이었지만, 애초에 상대방이 사족을 달지만 않았어도 헷갈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결국은 나를 위한 변명일 테지만.
하루 종일 꿉꿉하고 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옛날 같았으면 장마 뒤의 무더위에 해당되었겠지만, 아직 장마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이 무더위라니.
퇴근 후 자잘한 일들을 정리해 놓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나갈 준비를 한다.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마실 물도 준비하고 이어폰을 귀에 걸고는 평소처럼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직 해가 남아있지만 내가 걷는 방향은 동쪽이라 해를 등지고 걷는 것이어서 상관은 없었다. 저녁때가 가까워지고 하천가를 걸어가니 바람은 조금 시원했다. 길가에서 한 아저씨가 큰금계국 꽃씨를 모으고 계셨다. 저것을 어디에 심으려는 것일까? 꽃은 예쁘긴 하지만 유해성 2급 식물인데 굳이 저 꽃씨를 모으시는 이유는 무엇일지.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꽤 큰 당근밭과 그 옆의 포도밭을 볼 수 있다. 큰 도로변에는 카페가 있는데 그 카페 뒤쪽으로 이렇게 큰 당근밭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포도밭 옆에는 살구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주인이 살구를 따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엷은 주황빛 살구가 가득 열려 있었다. 포도밭에는 포도가 알알이 맺혀 커가는 모습이 보인다. 저 포도는 캠벨이기를 바라본다. 요새 샤인머스캣이 주로 나오다 보니 캠벨 포도 보기가 어렵다. 이 길에는 독특한 곳이 좀 있다. 포도밭을 지나면 양봉업자가 벌통을 두고 키우는 곳도 등장한다. 매번 지나가면서도 이곳의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장면들은 오히려 흥미를 이끈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오늘 하루 내가 어떻게 행동했었는가 생각해 본다. 특히 오늘 아침에 있었던 사소한 일은, 근본적으로는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인 것 같다. 상대방이 아무리 사족을 붙였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내용에는 크게 다를 게 없었으니까. 엄청나게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단지 나의 발품만 키웠을 뿐인 아주 사소한 일이어서 오히려 이렇게 생각을 곱씹는 것이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걷다 보면 그렇게 반성의 시간이 생긴다. 아, 그때 그러지 말걸, 한번 더 생각해 볼 걸, 조금만 참을 걸.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걸으니 기분이 별로다. 자기 학대로 느껴지는 탓일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잘못했다는 것에 방점을 찍으면 그 또한 독선이고 오만일 테니 오히려 약간의 자아비판, 그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니 정리가 좀 된다. 상대방이 느꼈을 당황스러움과 내 당황스러움의 정도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이것이 내 사회생활에 엄청난 오점이 될 건수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그리하여 길가에 환하게 피어난 원추리 꽃에 시선을 빼앗길 수 있었고, 은빛 종이가 넘겨지듯 물에서 뛰는 작은 물고기들을 보며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어느덧 집에서 걸어 나온 지 4 km쯤 되는 지점이다. 이제 왔던 만큼 돌아가면 되는지라 걸음의 방향을 돌렸다. 조금 지나니 넓은 논이 나타나고 그 너머에 아마도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경작하는 듯한 밭이 보였다. 저녁이라 그런지 많은 이들이 각자의 농작물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는 등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 나도 과연 은퇴를 하면 저렇게 농사일에 바쁘게 될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는 동물도 좋아하지 않고, 곤충도 무서워하는 편이라 농사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일 듯하다. 무엇보다 바삐 움직이는 저들을 보면서, 내가 저렇게 바쁘게 움직일 수 있을까 고민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해가 점점 더 기울어졌다. 오늘은 하루 종일 구름이 조금 끼었었는데, 저녁이 되니 하늘이 아름답고 불게 물들었다. 내일은 무척이나 맑고 더우려나 보다. 그렇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늦은 시간에 나와야 할까. 오늘은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들이 여기저기서 떠오른 복잡한 날인 듯하다.
한 시간 반쯤 걸으니 스마트폰 앱에서 걸은 거리와 걸음수, 맥박을 얘기해 준다. 어느덧 8 km 조금 넘었다. 그리고 배가 고프다. 집에 가서 오늘도 오트밀을 기반으로 하는 나의 저녁 식사를 조촐히 해 봐야지. 그런데 오늘은 상추와 바나나, 방울토마토가 들어간 샐러드를 만들어 먹어볼까 한다. 저녁이라 날채소를 먹는 것이 안 좋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오트밀, 연두부, 낫또에 샐러드를 먹는다고 해서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내가 걷기를 하는 것은 다이어트가 목적이 아니라 걷는 그 자체가 목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