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하지(夏至)
분명 아직 여름은 많이 남았는데 마음은 좀 쓸쓸해진다
어느새 1년의 절반이 거의 다 지나고,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이다. 게다가 오늘은 엄청나게 더울 것이란다. 바깥의 태양빛을 보니 정말 그럴 것 같다. 그런데 나는 하지가 되면 기분이 조금 울적해진다. 분명히 아직 추분(秋分) 때까지 낮이 여전히 길고 아직 삼복더위가 온 것도 아닌데 일단 오늘이 지나면 이제 낮이 조금씩 짧아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분이 지나면 느끼는 것을 나는 하지 때 꼭 느끼는 것 같다. 뭐 그렇다고 해서 심각하게 우울해진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그럴 정도로 예민한 성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서.
어쨌든 한여름에 들어선 것은 사실이고 우리나라의 덥고 습한 여름은 대책이 없다. 아직까지 우리 집 에어컨은 덮개도 안 벗겼다. 집안 온도는 30도를 가리키지만 양쪽 베란다를 열어놓으면 아직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탓이다.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한 편이니까. 그러니 오늘처럼 낮이 긴 날에는 어김없이 걷는 것이 좋다. 조금 덥기는 하지만. 그래도 구름이 살짝 끼어서인지 햇빛이 조금 부드럽다. 늘 가던 길을 따라가다 보니 낚시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이쪽은 아직 정리된 수변공원이 아니어서인지 아예 크게 자리 잡고 앉은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내가 즐기는 취미가 아니라서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이 좁은 하천에서 엄청난 대어를 낚을 것도, 그렇다고 매운탕 거리를 마련해 갈 것도 아닌데 이런 이른 저녁시간부터 낚시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간혹 대학생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과연 잡은 고기를 빼낼 수나 있을지 의심스럽기까지 한다. 그래도 뭐 자신들이 즐기면 뭐라 할 수는 없겠지.
큰길을 건너 반대편 하천 공원 쪽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길 왼쪽으로는 하천이 흐르고 오른쪽에는 밭과 집이 있는데 마을이 크게 형성된 곳은 아니다. 산책길 오른쪽에 마련된 공용 운동 기구들을 지나치면 작은 집 뒤로 망이 둘러쳐진 닭장이 있다. 큰 수탉과 암탉이 적절히 섞여 있는 이 닭장엔 오리도 있다. 그리고 작은 노란 얼룩무늬가 등에 있는 흰고양이도 있다. 노란 눈이 예쁘장한 이 고양이의 흰털은 잘 정리된 듯 깨끗했다. 길고양이는 아닌 듯하고, 아마도 이 집의 고양이거나, 길고양이였는데 이 집에 눌러살게 된 고양이인 듯했다. 닭도 오리도 이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들의 동거는 꽤 오래되었나 보다. 처음 이 고양이를 보았을 때 고양이는 나를 피했다. 가까이 가면 도망가곤 했는데, 오늘은 이 고양이가 닭장 앞에 자리 잡고 앉는다. 아직 개는 극복하지 못했지만 고양이는 극복한 편이라, 이 고양이와 눈인사를 했더니 고양이도 눈인사를 하고 야옹거린다. 가까이 가면 또 도망갈까봐 줌을 약간 당겨 고양이를 촬영해 보았다. 역시 예쁜 고양이이다. 이 닭장 근처에는 커다란 호두나무와 포도나무가 있어서 열매가 커져가는 것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아직 이쪽의 갈대는 벌초작업을 하지 않았다. 물이 상대적으로 깊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늘 걷는 하천공원까지 이어지는 이 길을 걷다 보면 갑자기 넓어지는 공간에 느닷없는 카페가 하나 자리하고 있는데, 산책을 하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곳이다. 갤러리 카페인지 주변에는 십이지신상을 비롯한 조각상들도 있어서 나름대로 흥미를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산책을 나온 것이니 그냥 이곳을 지나쳐간다. 카페 옆에는 모내기를 끝낸 논에서 탄탄하게 자라고 있는 모를 볼 수 있다. 모내기 초만 해도 가느다란 풀이었는데 이제 제법 튼튼하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벌초를 끝낸 갈대밭에서 새로이 갈대가 자라는 모습이 보였다. 며칠 전만 해도 끊어진 갈대 이파리들이 누워 있어서 휑한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조금씩 키가 커지는 갈대들을 볼 수가 있어서 또 다른 느낌이다. 이제 늘 걷는 산책길에 들어섰다. 이곳도 벌초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무성했던 갈대와 잡초들이 어느덧 정리가 되어 있었다. 무성한 갈대숲도 예뻤지만 산책하는 사람들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으니 하천 산책로 제초작업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무성한 초록색을 보다가 갑자기 누렇게 드러난 하천의 모습을 보니 조금 심심하긴 했다. 그래도 곧 갈대는 자라서 또다시 싱싱한 초록빛을 드러낼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개의 목줄을 풀어놓은 채로 산책을 시키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내가 멈춰 선 것을 보더니 '개 괜찮아요'라고 말을 할 뿐 묶을 생각을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제가 아주 많이 무서워하는 편이라서요'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더니 가까이 가서 개를 안아 드셨다. 그래도 끝까지 목줄을 착용시키지는 않으셨다. 게다가 이 아주머니는 자전거까지 타고 오셨다. 산책로 입구에 개 목줄을 채우고 배변봉투를 준비하라는 문구가 쓰여있고, 그 옆에는 산책로에서는 자전거 통행금지라는 표지판까지 있다. 산책로는 도로 정비도 잘 되어 있어서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길이다. 그러나 엄연히 산책하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 자전거를 비롯한 이륜차 통행을 금지한다는 문구가 있다는 것은 이것을 지켜달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저런 분들에게는 그런 표지판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민의식이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지역 격차가 있는 모양이다.
오늘은 저수지까지 걸어볼 예정이다. 주말에 산책 나오기 조금 어려울 것 같으니 평소보다 조금 더 걷는 것으로. 해는 산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길 옆의 밭에서는 잘 정리된 작물들이 커가고 있었다. 저녁이라 하천에서는 물고기들이 종잇장처럼 배를 드러내며 뛰고 있었고, 낮의 뜨거운 기운이 저녁의 서늘한 바람에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저수지에 가까워지니 빽빽하게 나무를 심은 풀숲에서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귄다. 저녁이라 잠자리에 모여든 것인지, 아니면 지나가는 나를 경계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새들은 그렇게 수선스럽게 짹짹대고 있었다. 그 숲을 지나면 아마도 농막인 듯 보이는 곳에 개 한 마리가 묶여있다. 지난번엔 두 마리였는데 한 마리가 안 보였다. 집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른다. 주인과 함께 산책 다니는 개들과 달리 한 자리에 묶여 저곳을 지키는 개인 모양이다. 내가 모르는 시간에 저 개의 주인도 함께 산책을 다닐까. 아니면 농막 주변에서 낯선 사람의 접근을 막고만 있는 것일까. 개의 묶여있는 모양을 보니 한가로이 산책 나갈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짧은 오르막의 끝에 도달한 저수지는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다. 저수지 수문 아래쪽은 정비사업 중인지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흙길을 밟으며 잠시 스트레칭을 한 뒤 저수지를 내려간다. 이제 왔던 만큼 되돌아갈 일만 남았다.
보라색 도라지 꽃들이 피어나고 깨밭에서는 깨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아직 여름 절기들이 많이 남았는데도 나는 하지가 되면 여름이 저문다는 느낌이 든다. 기분 탓이겠지...?
저녁이 되어 서늘해지니 사람들이 점점 더 산책을 많이 나오고 있었다. 왔던 길은 이미 많이 어두워졌으니 돌아가는 길은, 공기는 좋지 않지만, 큰길로 가야겠다.
오랜만에 우리 아파트 뒤쪽의 계단길로 향했는데 아파트 뒤쪽 산책길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이 시간이면 산책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편이라 이상하게 여겼는데 계단을 다 오르고 보니 이해되었다. 산책길 정비 공사 중. 다행히 한 사람이 걸어 다닐 정도의 길은 열려있었다. 그렇게 길을 따라 우리 아파트로 들어오니 벌써 집에서 나간 지 두 시간. 오늘도 이십 리 프로젝트를 이렇게 완료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