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쉬어가는 길목
비 오는 날에는 늘 몸보다 마음이 먼저 젖는 것 같다.
이른 아침, 토독-톡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 눈을 뜨고, 졸린 눈꺼풀을 비비며 유난히 어두운 집 안을 둘러보다 보면 건조한 마음속에도 어느새 빗물이 새어들어 촉촉해지곤 했다.
내 아버지의 고향은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시골이었다. 얼마 전 우연히 그곳을 지나갈 일이 있어 들렀다가 나는 뜻밖에도 도시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던 짙은 사색을 할 수 있었다. 회색빛 가득하던 건물 틈 사이에서 벗어나, 온통 파랗고 옥빛 가득한 세상에 들어서니 마음속 심해 깊은 곳에 깔려있던 어린 내가 호기심 어린 고개를 들었다.
국가 공휴일에도 어김없이 장사하는 동네의 작은 슈퍼마켓,
털털털- 낮은 진동 소리를 내며 젖은 흙을 지그시 밟는 노란 트랙터,
누군가가 좋은 대학에 갔는지 자랑스럽게 걸려있는 반들반들한 플랜카드,
마을 어귀의 낮고 낡은 담벼락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는 글귀와 함께 아기자기한 귀여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 것들을 보다 보니 문득 아버지가 부러워졌다.
평생을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방인인 나도 이렇게 벅차고 그리운 이곳이, 진짜 고향인 사람들은 어떻게 느껴질까. 바로 곁에서 들리는 하천의 물방울 튀기는 소리, 자동차 경적소리의 공포를 평생 느껴보지 못한 풀벌레들의 우렁찬 노랫소리, 코끝이 시리도록 새하얗게 맑은 공기가 너무나 부럽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자연을 동경했던 것 같다.
내가 9살쯤 되던 무렵,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는 조그만 인조 시냇물이 있었다. 제법 진짜처럼 꾸며진 그곳에는 쉴 수 있는 정자도 있었고, 작은 물고기 몇 마리도 살고 있었다. 당시 내 친구들이 문구점 앞에 앉아 게임을 할 때, 나는 늘 그곳에 가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반짝이는 돌을 모아다가 고디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면, 살짝씩 발을 담그기도 하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놀았다. 유년 시절, 소중한 기억들이 참 많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그런 작은 것들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
시골길에는 정말이지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조금 걷다 보면 보이는 과수원의 열매가 무얼지 궁금했고, 인기척이 없는 옛날식 주택들이 보일 때면 그곳에서 사는 나를 그려보기도 했다. 여태 마음이 복잡할 때면 바다를 찾곤 했던 나지만, 가끔은 이런 곳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말주변이 없고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기에, 이상하리만큼 사람이 드문 이곳에서 오히려 마음의 피로가 씻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나만을 위해 마련해 준 휴양지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진짜 나의 숨소리가 들리는듯한 고즈넉한 오래된 나무 밑에 서자,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복잡한 소음들이 하나씩 잠재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소음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은 본래의 소리를 되찾게 되는 것일까. 선명한 간판 하나 없는 빛바랜 이곳에서,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뚜렷해지고 있었다.
발끝에 닿는 흙을 조용히 느끼며 마음에 연고를 한 겹, 두 겹 발랐다.
지금도 몇십 년간 도시에서 홀로 곧게 서 있는 소나무 같은 나의 아버지처럼, 다시 회색빛 세상으로 돌어가도 쉽게 상처받아 쓰러지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