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신사에게 배운 품격
Gloomy
런던의 첫인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랬다.
건물 안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히드로 공항에 발을 내디뎠을 때 어딘가 모르게 회색 안개가 내려앉은듯한 서늘한 분위기가 신기해 주위를 둘러보았던 기억이 난다.
"영국에 무슨 목적으로 왔니?"
"영어 공부하러 왔어."
"다시 말해봐. 너는 이곳에 공부하러 왔다며. 그렇게 말해서는 안돼"
처음 만난 영국인, 출입국 심사관부터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는 강압적인 공항 분위기에 긴장해 거의 울기 직전이었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냈다.
"... 나는 영국 런던에 어학연수를 하기 위해 한국에서 왔어. 영어를 배우는 것이 나의 주목적이야."
"그것 봐, 할 수 있잖아. Good Luck!"
도장을 쾅!
지잉-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영국으로 향하는 문도 열렸다.
내 곁에는 엄마도, 아빠도 없다. 지금부터 오로지 나 스스로 모든 걸 헤쳐나가야만 한다.
내 몸집만 한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쿨그레이 빛 도로 위를 질주하는 새빨간 2층버스, 그 사이로 보이는 무채색의 건물들과 무표정의 사람들.
이곳이 앞으로 내가 10개월간 살게 될 곳이었다.
다소 차갑던 첫인상과는 달리, 예상외로 런던 사람들은 무척 젠틀하고 친절했다.
영국에서의 첫날, 동네를 탐방하다가 발견하여 들어간 마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와,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가 굉장히 많네?’
식사가 될 만한걸 골라야 했는데, 알록달록 신기한 과자와 디저트에 정신이 팔려 하나 둘 담고 있을 때였다.
"Excuse me, young lady, would you mind if I picked up an item from over there?"
(어린 숙녀분, 죄송하지만 제가 거기 있는 물건 하나를 집어도 괜찮을까요?)
내게 말을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장 보러 나온듯한 노신사였다.
내가 쭈그리고 앉아있던 탓에, 내 앞의 무언가를 집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앗 죄송합니다!!” (물론 영어로 말했다)
죄송한 마음에 뭐라고 더 덧붙이고 싶었지만,
당황한 나머지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노신사는 잠시 미소 짓더니,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 앞의 수프 박스를 챙겨 들고 계산대로 떠났다.
지도를 꺼내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줄곧 정중하게 내게 양해를 구하던 노신사의 표정이 떠올랐다.
누군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짜증이 났을 법도 한데,
그분은 내가 나이가 어리다고, 외국인이라고 무시하지 않았었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더니.
별거 아닌 친절한 말 한마디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구나.
나도 앞으로 남에게 더욱 상냥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겠다.
새삼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렌지 색 노을이 부드럽게 런던아이를 비추는 게 보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몽글몽글한 온기가 차오른다.
낯선 땅에서의 첫날이 무사히 지나갔다는 안도감과 함께,
긴장감, 걱정, 외로움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