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개성의 도시, 런던
영국에 와서 내게 생긴 변화가 있다면, 바로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로 외출을 하는 것이 편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런던이 세계적인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실외에서의 화장 유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분위기도 한몫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 사람들은 남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 길을 걸어가며 무슨 말을 하는지, 심지어 잠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할지라도 자신 이외의 타인에게는 별 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누군가 나와 겉모습이 다르다고 해서, 빤히 쳐다보거나 옆 사람과 속닥거리지 않는다. 그것이 무례하다는 상식이 암묵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널리 인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개성 있는 옷차림과 메이크업, 액세서리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영국의 오픈 마인드(?)를 크게 실감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어느 토요일 대낮, 런던의 Soho거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핸드폰을 보며 걷다 무심코 앞을 보았는데, 내 바로 앞에 한 중년의 남성이 짧은 바지와 망사 스타킹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게 아닌가.
Soho는 수십 년 동안 런던 LGBTQ+ 커뮤니티의 중심지였으므로, 만약 그때가 야심한 저녁시간이었다면 나도 별생각 없이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대낮에, 그것도 주말에 막상 그런 파격적인(?) 패션을 마주한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누군가 사진이라도 찍어서 올리면 어떡하지..? 길 가던 사람이 조롱이라도 하면...’
마침 방향도 같았던지라, 계속 앞을 향해 걸어가는 그를 나는 조심스레 뒤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 맞은편에서 마실 나오신 할머니 무리들이 길을 건너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망했다. 아저씨 어떡해...‘
나는 당사자도 아닌데, 눈앞이 아득해지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K-할머니들의 혀 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그때였다.
"Oh, your shoes are lovely. I wonder where you got them."
(네 구두 정말 예쁘다. 어디에서 샀는지 궁금해.)
스쳐 지나가던 무리 중에 한 할머니가 아저씨에게 수줍게 말을 걸었고, 아저씨는 미소를 지으며 스몰톡을 이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가 당연히 평가당하고, 잔소리를 들을 것이라 예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색안경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여기는 이런 곳이구나.
정말 부러웠다. 부럽다는 말 외엔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인생의 적지 않은 순간들을 얼마나 남 눈치를 살피며 사는 데에 썼던가.
런던 사람들의 패션이 단조롭지 않고 자유롭고 개성이 넘친다는 점은, 사실 나에게는 좀처럼 적응되지 않던 부분이기도 했다.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던 내 옷장에는, 아무래도 무채색의 ‘튀지 않는’ 옷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남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을까?
이걸 입으면 내 체형의 단점이 부각되는 것은 아닐까.
인생의 대부분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은, 놀라움보다는 씁쓸함으로 다가왔다.
나의 옷차림, 머리스타일, 몸매 등을 평가당할까 봐 두려워, 정작 내 개성과 취향을 스스로 감추느라 급급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가장 가까운 나의 어머니조차도,
내가 오늘 무엇을 입었는지, 어떤 재킷을 걸쳤는지를 보며 칭찬보다는 걱정스러운 눈길을 먼저 보내셨다.
“좀 더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는 게 어떻겠니?“
“그런 옷들은 네 몸매가 날씬하지 않게 보이게 한단다.”
사랑과 관심에서 비롯된 말씀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를 미워해서 하는 말이 아닌 걸 알고 있지만, 그런 어머니의 말들은 매번 가시처럼 마음속에 깊게 뿌리 박혔고, 내가 입고 싶은 옷조차 눈치를 봐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점점 더 작아졌고 자존감이 자주 다쳤다.
런던의 시민들은 자유로웠다.
남자들은 노란색, 빨간색의 화려한 정장을 입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고, 손질되지 않은 부스스한 턱수염을 휘날리며 직장으로 향했다.
여자들도 자신의 몸매가 어떻게 보이든 전혀 걱정 없이 크롭티를 즐겨 입었으며, 양갈래로 땋은 알록달록한 머리 등으로 개성을 마음껏 표출했다.
오물을 뒤집어쓴 채 거리를 걸어가는 하수구 청소부,
길에 앉아 “Any changes?"를 외치는 노숙자들도 전혀 차별을 당하거나 홀대받지 않았다. 짧은 동정의 시선조차 없다. 직업과 외형을 떠나 개인으로써만 존재하는 사람들이 촘촘하게 모여, 자연스럽게 런던의 한 문화로 완성된 것이다.
나는 어쩌면 이곳에 와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배울 점이 정말 많다는 것도.
옛날 어느 중국 성현이 했던 말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는 것이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구나.
나는 부쩍 가벼워진 발걸음을 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