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가 준 보름의 행복

by 조건

우리 집은 야산을 개발하여 허허벌판 이지만 넓은 집을 짓고 살았다.

3만평의 땅에 과수원도 있고 가축도 많이 기를 수 있었다. 거기에다 2차 잠업 증산 5개년 계획(1967-1971)에 의하여 정부에서 잠업을 권장하여 각 농가에선 너도나도 누에치기가 연중행사가 되었고 봄, 가을 누에치는 계절이 되면 일꾼을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이고 선불을 주고 미리 예약해도 그때가 되면 서로 자기 일을 위해 일손을 빼가는 이른바 일꾼 쟁탈전이 벌어져 이웃 간에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우리 집은 농사의 규모가 커서 고정으로 집에서 숙식하는 일꾼이 4-5명은 되었다. 누에는 넉 잠을 자고 5령에 섶에 올리는데 3 잠부터는 뽕잎을 무섭게 먹어댄다. 고치가 되어 실을 만들기 위해 영양을 비축하기 위함이다.

어느날 비상 대책 회의가 열렸다. 모자라는 인원을 어떻게 충원 하느냐가 주제였다.

웃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일꾼을 긴급 수배하자는 것인데 방법이 없었다. 그 때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 방학하면 네 친구들 몇 명 데려오면 안 되겠니? 그리고 명순이 친구들도 올수 있으면 오라고 해. 숙식은 물론 품값도 넉넉히 챙겨줄 테니 ”


명순이는 동갑네기 집안 조카다. 일을 계속하는 것도 아니고 2주 정도면 되니 머리도 식힐 겸 알아나 보라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남자 애들은 그럴 수 있다 해도 다 큰 처녀들을 남의 집에 보낼지 의문이다. 다음 날 본인들의 의견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합의에 이르렀다. 어렵게 우여곡절을 넘겨 부모의 허락 하에 면장이신 아버지가 각 학생의 부모에게 신원보증과 불상사를 책임지겠다는 보증이 있고나서 남학생 다섯, 여학생 다섯 이 일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 시절 자신도 모르는 사춘기를 접한 풋풋한 사과 같은, 싱그러운 꿈을 먹고 커가는 하이틴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우연히 때 아닌 그룹 미팅이 돼버렸다. 아버지의 장황한 연설의 내용은 이랬다.


“너희는 아름다운 꿈을 가진 인생의 황금기이다. 또 학업에 정진해야 할 때이다. 이렇게 고맙게도 일을 도와주러 왔으니 아무 사고 없이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돌아 갈수 있도록 하고 모든 것은 너희 부모님께 서약 했으니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명심해라.”


이주간의 즐거움이 주어진 우리는 주어진 자체가 즐거워 첫 날을 잘 보내고 둘째 날이 되었다. 어제의 즐거움을 상상하며 일을 하고 있는데 저만큼 우물가에서 여자 아이의 우는 소리가 났다. 달려가 보니 그 시절 믹서기가 흔하지도 않았고 산속이라 방앗간도 먼데다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이라 그냥 맨손으로 학독(돌확의 전라도 방언)에 고추를 갈았던 것이다. 보리쌀이며 모든 곡식과 음식재료 들을 거기에 갈아 먹던 시절이었다. 억세고 힘 센 시골 아낙들도 맨손으로 고추를 갈면 한참씩 그 고통으로 아픔을 겪어야 했는데 여린 손으로 덥석 고추를 헤집고 갈았으니 그 뜨겁고 화끈거림은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며 엉엉 우는 그녀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나고 찬물에 손을 담그고 몇 시간이 지나서야 아픔이 가라앉았는지 빨개진 볼이 식었다. “엄마야”를 소리치는 그녀의 어린애 같은 여림과 뭔가를 해보려는 아름다움에 나는 그녀에게 빠지고 말았다. 얼굴이 동그랗고 하얀 피부에, 자그마한 체구에다 수줍은 듯 빙그레 짓는 미소는 나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고 말았다.


작업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로 맘에 맞는 파트너 끼리 손을 맞추어 재잘거리며 힘 든 줄 모르고 잘 진행되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누에 밥을 줄 때까지 4시간의 휴식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옆에는 쑥을 뜯어다가 모깃불을 놓기도 했다. 감자며 옥수수 등 간식을 푸짐하게 쌓아 놓고 돌아가며 3,6,9게임도하고 벌칙으로 노래며 장기자랑, 엉덩이로 이름쓰기 등 즐거움으로 피로는 이미 다 날아가고 있었다. 열 명의 웃음소리는 여름밤 하늘에 메아리 쳤다. 그녀와 나는 모두가 잠들은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몰래 빠져 나온 우리는 어스름 달빛아래 오솔길을 손을 잡고 걸었다. 가끔은 어설픈 성숙함으로 침묵이 흘러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호흡을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즐겁고 행복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모기가 극성을 부려도 우리의 설렘을 잠재우지 못했다. 달 밝은 밤 복숭아 과수원 길을 거닐며 달빛을 노래하고, 비 오는 날이면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반주삼아 “긴 머리소녀”라는 노래를 합창 했다. 누에가 뽕잎을 먹는 소리는 우리를 위한 오케스트라였으며, 봄을 노래하는 뻐꾸기와 소쩍새는 우리를 축복해주는 들러리 같았다.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준비된 신의 선물 같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꿈같은 보름이 지나가고 우리는 꼭해야할 얘기는 한마디도 못하고 어떠한 약속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그 많은 밤들을 왜 바보처럼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약속 없는 헤어지고 말았는지 후회로 며칠을 가슴앓이를 했다. 얼마 후. 조카에게 그녀를 소식을 물었다. 바쁘다고 소식을 미루던 그가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삼촌! 민영이 전학 갔어. 공무원인 아빠가 발령 나서 가족이 다 이사 갔어”

하늘이 무너지는 그 얘기에 나는 절망의 늪으로 잠기고 말았다.


지금도 빗소리를 들으면 고추를 갈고 손이 아려 밤새 고통스러워하던 그녀가 생각난다. 나의 삶 가운데 그 때만큼 설레는 마음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너본 기억이 없다. 소중한 추억을 아름다움으로 채색하고 그리움으로 포장하여 기억의 창고에 잘 넣어 놓았다. 그녀도 가끔씩 그날을 기억 하는지 또 어떻게 변해서 지금을 사는지 궁금한 마음으로 그날을 추억하며 또 하루를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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