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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Aug 13. 2024

127. 신유빈, 그녀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

(장면 1)

2023 항저우 아시안 게임의 탁구 혼합복식 시상식

공동 3위로 시상대에 오른 장우진 선수가 전지희 선수의 메달이 목에 잘 걸리도록 정리해 주는 모습이 화면에 잡히자 관중들은 ‘와’ 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관중들 반응에 두 선수는 수줍어 어쩔 줄 몰라하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1, 2위를 차지한 중국 선수들도 따라 웃으면서 시상식 분위기는 한껏 달아오른다. 이어 공동 3위로 시상대에 오른 임종훈선수와 신유빈 선수는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볼하트를 하면서 활짝 웃는다. 신유빈 선수가 제안했을 것이다.(실제로 신유빈이 “오빠, 제가 뭐 하자고 하면 해줄 거예요?” 부탁했다는 인터뷰 영상이 있다) 신유빈은 임종훈에게 ‘오빠 잘했어’라며 엄지 척을 하고 임종훈은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손으로 얼굴을 가리기에 급급한데 얼굴은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메달을 받은 후, 신유빈과 임종훈은 하이파이브를 하며 자신들의 퍼포먼스에 만족해한다. 이어 임종훈은 장우진이 전지희에게 했던 것처럼 신유빈의 옷깃을 매만지며 메달을 정리해 준 후, 신유빈의 등을 토닥인다. 마치 “봐, 나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임종훈의 위트 있는 행동에 관중들은 또 한 번 뒤집어지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아니 시상식이 이렇게 흐뭇하고 즐거울 수 있나고요? 이제까지 본 시상식 중 가장 유쾌한 시상식이었다.


(장면 2)

2024년 파리 올림픽 여자 단체전 동메달 획득 후 인터뷰

기자:신유빈 선수는 두 번째 메달이죠?

신유빈: 전 종목에 출전하면서 동메달 결정전도 3번 했는데 마지막 단체전에서는 언니들과 함께 하니까 더 지치지 않았던 것 같고, 지치지 않게 정신을 꽉 잡고 했던 것 같아요. 언니들이 너무 완벽하게 플레이를 하고 저도 너무 신기하고 언니들이 너무 대단해요. (언니들을 한 번 쓱 본 후) 언니들한테 뽀뽀하고 싶어요.

이은혜: 이따 뽀뽀하자. 방에 들어가서 저희 뽀뽀할게요.

기자: 지금 한 번 해 주시죠.

전지희: 부끄러워요.

기자:서로가 서로에게 한 마디씩 해준다면요?

이은혜: 지희 언니는 같이 귀화선수잖아요. 늘 언니 보고 많이 배우고 힘 받아서 언니한테 너무 고맙고요. 유빈이는 막내로서 대한민국 탁구를 이끌어가는 게 얼마나 부담이 큰지 힘든 거 보면서 어린 나이지만 저도 많이 배웁니다.

(전지희 선수와 신유빈 선수를 보며) 사랑해요.

신유빈:사랑해요

전지희:사랑해요

신유빈:혼자였으면 하지 못할 것들이었는데 이렇게 언니들이랑 같이 시합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는데 그동안 언니들이 힘들었던 것 제가 옆에서 다 봐왔잖아요. 언니들이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것 같아서 저도 기분이 좋고 제가 믿고 경기할 수 있어서 언니들한테 너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전지희: 유빈이가 어린 나이에 그냥 잘 친다는 이미지만 시합 때 보잖아요. 저는 솔직히 유빈이가 새벽부터 야간까지 연습하는 모습 더 많이 봐요. 그 나이에 너무 고생 많았고 너무 큰 부담감 가지고 한국 탁구 대표로 에이스 역할로 슈퍼 스타 되는 거 너무 기쁘고요. 은혜 선수는 너무 고생 많이 했어요. 큰 대회에서 귀화선수 한 명이라는 제한 때문에 몇 년 동안 고생 많았는데 이겨내서 함께 단체전을 하게 돼서 너무 고맙고 좋아요. 사랑해요.

신유빈:사랑해요.

이은혜:사랑해요.


언니들과 뽀뽀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던가? “언니들한테 뽀뽀하고 싶어요”라는 말은 그냥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친한 동생이 “언니한테 뽀뽀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면 나는 아마 ‘아니, 애가 미쳤나?’ 질색팔색하며 뒷걸음질 쳤을 것이다. 그만큼 이 말은 신뢰와 애정이 쌓이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그걸 또 유쾌하게 받아주는 언니들이라니! 서로가 힘들어하는 부분을 정확히 알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려는 마음과 행동들이 ‘핑퐁핑퐁’ 오가면서 이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고마운 나머지 “사랑해요”라는 말이 흘러넘치는 인터뷰. 


예전 같았으면 동메달을 따면 침울한 표정이었는데 동메달을 따도 이렇게 활짝 웃고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우리도 이제 순위에 연연하지 않고 성과에 대해 즐길 줄 아는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보는 사람마저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러한 분위기의 중심에 2004년생 신유빈 선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2024년 파리 올림픽 단식, 혼합복식, 단체전까지 모든 종목에 출전했다. 동메달 결정전만 3번을 치렀고 혼합복식과 여자 단체전에서 두 개의 동메달을 땄다. 혼합복식은 12년 만에, 여자 단체전은 16년 만의 메달이라고 하니 한국 탁구계에 이만한 경사가 없다. 2021년 시작된 손목부상으로 탁구를 치지 못했던 1년 동안 너무 힘들어 하루도 안 빼고 울었다던 그녀가 손목부상을 이겨내고 이뤄낸 결과라 더 놀랍다. 모든 종목에 출전해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커 부담이 될 법도 한데 실수를 해도 웃음을 잃지 않고 다시 파이팅을 외치는 그녀가 어쩜 그리 예뻐 보이는지. 그야말로 밝은 에너지가 뿅뿅 흘러넘친다. 누가 지었는지 ‘해피 바이러스’라는 별명이 찰떡이다.

 

메달도 메달이지만 인상적이었던 건 그녀가 올림픽을 대하는 자세였다. “지쳐서 지면 억울하다”라며 쉬는 시간마다 바나나, 납작 복숭아, 주먹밥을 챙겨 먹는 모습은 심히 귀여웠다. 긴장감 있는 경기인데 감독님한테 코칭을 들으면서 바나나 먹는 걸 보면 올림픽이 아니라 마치 소풍 나온 아이 같은 발랄함과 천진함이 느껴졌다. 진지하다 못해 비장한 선수들의 얼굴표정만 보다가 핸드폰으로 인증숏을 찍어가며 야무지게 간식을 챙겨 먹는 그녀를 보는 건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치열한 경쟁이라는 올림픽에서 대조되는 투샷. 같은 공간 다른 세계가 느껴졌다. 어쩌면 신유빈의 간식 먹는 영상이 그리 인기가 있었던 건 ‘올림픽이라는 무대가 꼭 무거워야만 하나? 꼭 진지하기만 해야 하나?’라는 생각 때문이지 않았을까? 경기 중 한 포인트를 따면 한쪽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파이팅을 외치고, 실수를 하더라도 웃음을 잃지 않고 중간중간 간식을 오물거리던 그녀. 그녀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올림픽을 치렀다.


그녀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계가 마음에 든다. 임종훈 선수를 볼하트하게 만들어 웃음꽃을 피우고, 언니들이 너무 고마워 언니들에게 뽀뽀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 인터뷰 때 신유빈 선수보고 중앙에 서라는 전지희 선수의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전지희 선수를 중앙에 세우는 그녀. 이은혜 선수가 인터뷰 중 눈물을 쏟자 꼭 안아주는 그녀. 그녀의 세계는 참 따뜻하다. ‘치열한 스포츠의 세계에서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저렇게도 존재할 수 있구나.’라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그녀에게서 본다.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느냐는 결국 내 선택에 달려 있다는 걸 그녀를 통해 배운다. 그래서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앞으로의 계획도 그녀답다.

“메달을 딴 건 좋지만 이번 경기는 끝났고 다음 시합이 있으니까요. 잘 쉬다가 탁구 계속할 거니까 열심히 연습할 것 같아요.” 그녀의 경기는 계속될 거고 그녀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계 역시 계속될 것이다. 그녀가 만든 세계, 앞으로 그녀가 만들어 나갈 세계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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