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파리 올림픽 탁구 신유빈 선수의 단식 8강전이 있는 날. 부랴부랴 저녁을 먹고 회원들과 함께 시합을 보기 위해 종종거리며 탁구장으로 향했다. ‘함께 응원하면서 보면 더 재미있겠지? 함께 보면 기쁨이 배가 될 거야.’라는 기대 만땅의 마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탁구장 문을 경쾌하게 열어젖혔다. 경기를 보면서 회원들과 대동단결할 생각에 이미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마침 상대 선수도 일본 선수라 ‘축구 한일전 못지않게 재미있겠는 걸’ 실실 웃으며 혼자 신이 났다.
두둥! 드디어 신유빈 선수와 히라노 미우 선수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내가 예상한 그림이 아닌데?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던 회원들이 TV 앞으로 몰려들어야 하는데 함께 응원해야 하는데 들어올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신유빈 선수가 8강전을 하든 말든 관심이 없다. 한 탁구대에서는 이번 달 말에 열리는 전국 오픈 탁구대회를 위한 맹연습이 한창이고, 또 다른 탁구대에서는 초보 회원들이 랠리 연습을 하는데 경기에 관심조차 없다. 게임을 하고 있는 두 명의 남자 회원들 역시 “몇 대 몇이에요?”라고 중간중간 물어볼 뿐이다. 어제는 장우진 선수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여자 경기라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건가? 게임을 지켜보는 사람은 나와 관장님, 그리고 2명의 회원 총 네 명이다. 하지만 관장님도 금세 다음 레슨을 위해 레슨실로 들어가고 이제 남은 사람은 3명뿐이다. 신유빈 선수가 3세트를 내리 이기자 두 명의 회원도 “끝난 거나 마찬가지네. 이제 탁구 치러 가요.”하면서 자리를 떴다. ‘아니 어디 가시냐고요?’
덩그러니 TV앞에 혼자 남아 신유빈 선수를 응원하면서 생각했다. 아 놔! 내가 원하던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고요. 아니, 우리 오늘 탁구로 대동단결하는 날 아니었어요? 나만 김칫국을 들이마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끝까지 지켜본 시합은 역대급 경기였다. 히라노 미우 선수가 갑자기 땀이 난다고 환복을 하더니 3대 3으로 쫓아와 듀스의 듀스 접전 끝에 13대 11 신유빈 선수의 승리로 끝이 났다. 탁구장에 막 도착해 여섯 번째 세트부터 함께 응원하기 시작한 한 회원과 손에 손을 맞잡고 탁구장을 방방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너무 큰 환호성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에라 모르겠다. 무시하기로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대하고 왔던 마음을 불살라야 했다. ‘탁구는 보는 것보다 치는 게 더 재미있다.’라는 말을 탁구장 회원들이 오늘 증명하고 있나 보다.
탁구장 사람들의 이런 뜨뜻미지근한 반응 때문에 여자 탁구 단체전 동메달 결정전은 집에서 혼자 보기로 했다. 어차피 대동단결이 안 될 거라면 마음껏 소리 지르면서 응원하고 싶었다. 실제로 방 안에서 “와”와 “아”를 교차하며 난리굿 부르스 응원을 했다. 마침내 독일을 상대로 전지희, 이은혜, 신유빈 선수가 16년 만에 단체전 동메달을 땄다. 감격에 겨워 눈물이 나 한참을 멍하니 있다 이 순간을 함께 나누고 싶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탁구장으로 향했다. ‘16년 만의 단체전 동메달이잖아. 이번엔 뭔가 반응이 있을 거야.’ 기대감이 퐁퐁 샘솟았다. ‘아싸! 이 기쁨을 함께 나누자고요.’
구장에는 관장님을 포함 다섯 명의 회원이 있었다. ‘다들 올림픽을 보느라 안 왔나?’ 나는 감격이 채 가시질 않아 흥분한 상태였고 어찌 되었든 이 기쁨을 누구 와든 나눠야 했다. 제일 먼저 눈을 마주친 회원에게 대뜸 “여자 단체전 경기 봤어요? 진짜 멋있지 않았어요?”라고 서둘러 물었다. “정말 대단했어요. 전지희 선수는 어떻고 이은혜 선수는 어떻고 등등.”이라는 답을 정해놓은 채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내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그는 쿨하게 “봤어요. 잘하던데요?” 한마디 하더니 한 회원과 뚜벅뚜벅 탁구를 치러 나갔다. 헐! 그게 다예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관장님을 쳐다보며 ‘관장님과 단체전 소감을 나눠 볼까?’ 했지만 관장님 역시 한 회원의 레슨을 위해 레슨장으로 들어갔다. 메달을 딴 지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감동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회원들은 이미 일상으로 돌아가 자기 자리에서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크할 수가 있나? 올림픽은 올림픽이고 내 탁구가 더 중요하다는 건가? 이번에도 김칫국을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켰다.
매스컴에선 연일 탁구 대표팀이 혼합 복식에서 12년 만에, 여자 단체전에서는 16년 만에 메달을 땄다며 난리가 났다. 신유빈 선수는 또 어떤가? 그녀는 밝고 웃음 짓게 만드는 긍정의 아이콘으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 여동생이 되었다. 이렇게 탁구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탁구의 위상이 높아진 것만 같아 탁구인으로서 뿌듯했다. 올림픽 내내 대표팀 선수들의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보면서 격하게 응원하고 몰입했기에 이런 분위기에 흠뻑 취했다. ‘선수들처럼 멋지게 쳐야지, 더 열심히 연습해야지’라는 의지도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여운이 가시질 않아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올림픽 어떻게 보셨어요?”라며 소감을 묻고 다녔다. 감동을 함께 나누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덕지덕지 남아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눠야 나의 올림픽 대장정(누가 보면 내가 올림픽에 참가한 줄?)이 끝날 것 같았다. 배운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한 회원은 “올림픽 탁구는 처음 봤어요. 제가 탁구를 해서 그런지 정말 재미있더라고요.”라는 소감을, 여성 센터에서 탁구를 배우고 있는 동생은 “더 일찍 탁구라켓을 잡았어야 했는데 아쉬워요. 선수들 발끝에라도 쫓아갈 수 있을까요?”라는 소감을 말했다. 탁구를 치진 않지만 탁구 경기를 재미있게 봤다던 지인의 시청 소감은 신선했다. “조그만 탁구공을 무슨 보물 다루듯이 하면서 서비스를 넣던데 공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탁구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더라고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예리한 관찰력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성에 차진 않았지만 이 정도 소감을 나누었으면 됐다 싶어 ‘이제는 나도 일상으로 복귀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렵, 탁구 선수 신유빈이 광고업계에서 스포츠 스타 손흥민 선수와 트로트 가수 임영웅을 제치고 광고 스타 브랜드 평판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런 분위기라면 ‘탁구에 대한 인기가 높아져 너도나도 탁구를 하겠다고 하는 거 아냐?’ 흐뭇해하며 관장님께 물었다. “올림픽 후 탁구장에 회원이 좀 늘었나요?” 답정녀답게 이런 말이 나오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럼 늘었지. 늘었고 말고.” 하지만 우리 관장님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거 전혀 없는데? 올림픽 보고 탁구 치겠다고 오는 사람 없는데? 회원이 늘었던 건 <올탁구나>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될 때뿐이었어.”
아! 어쩌면 이렇게도 매번 기대가 빗나가는지. 그럼에도 유난히 덥고 습했던 이 여름, 파리 올림픽에 흠뻑 취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물론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다했지만 말이다. 이제는 올림픽이라는 추억을 떠나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와 나의 탁구를 칠 때가 왔다. 올림픽 앞에서도 본인들의 탁구가 더 중요한 우리의 시크한 회원들 속에서 탁구를 칠 때가 왔다.
올림픽은 올림픽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