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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Oct 15. 2024

필사의 나날들

 드디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필사가 끝났다. 눈앞에 A4용지 62장이  인쇄되어 나를 쳐다보고 있다. 4주에 걸쳐 매주 한 챕터씩 토론을 하고 모임 사이사이 필사를 해 온 대장정의 끝인 결과물. 마지막 장 ‘과학혁명’ 부분에서는 속이 울렁거려 토할 뻔했다. 단기간에 인류의 빅 히스토리를 머리에 집어넣으려 하니 그럴 만도 했다. 필사를 하다 토할 수도 있다는 감각을 느낀 건 낯선 경험이었다. 636페이지 중 10분의 1이 넘는 부분을 필사했으니 정말 징글징글하다. 처음 필사를 시작할 때에는 이토록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을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증상이 경미했으나 이제는 읽고 토론하는 모든 책을 필사하지 않고는 못 넘기는 중병에 걸리고야 말았다.


매주 한 권의 책을 읽고 토론한 지 10년이 넘었을 무렵, 뭐라도 써야 할 것 같은 날이 찾아왔다. 쓰고 싶은 욕망이 턱밑까지 차올랐으나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시작한 것이 필사였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문장을 옮겨 적는 필사가 기본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기에 읽고 토론하는 삶에 필사 하나를 추가하기로 했다. 필사의 사전적 의미는 ‘베끼어 씀’이다. 쓰긴 써야겠는데 어디에서도 글쓰기를 배워 본 적 없는 이가 가장 만만해 보이는 필사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 모른다.


우선 필사의 여러 가지 방식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인상적인 문장을 노트에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는 방법이 있는데 내겐 맞지 않았다. 개발세발 악필인 나는 내가 쓴 글을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인지 ‘너’인지 알 수 없어 난감하고 당혹스러운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필사라는 게 기본적으로 지속성이 있어야 하는데 매번 내가 쓴 악필을 보며 필사를 이어나가는 건 정신건강에 심히 해로울 것 같아 손으로 쓰는 건 포기했다. 워드 프로세서로 필사하는 방법도 시도해 보았는데 독수리 타법인 내게는 이 또한 맞지 않았다. 따로 시간을 내 타자 연습도 해 봤지만 바로 필사를 시작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기에 지금의 보도 듣도 못한 나만의 방법이 생겨났다.


바로 갤럭시 노트 핸드폰 메모장에 오른손 검지 하나(열손가락 중 오른손 검지만 열일하고 있는 중이다)만 이용해 열심히 자판을 두드린 후, 필사한 문장을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에 보내 컴퓨터 파일로 옮겨 인쇄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필사를 할 줄 알았더라면 ‘자판 연습을 더해볼 걸 그랬나?’라는 후회도 가끔 들지만 한 번 몸에 밴 습관은 웬만해선 바꾸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지금의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변명을 하자면 이 방법 또한 내게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누구에게도 권할 수  없지만 내게는 맞는 방식임에는 틀림없다. 효율성을 위해서라면 애당초 필사라는 행위를 하고 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손에 만져지는 물성을 좋아해 필사본을 기어이 종이로 인쇄해 철을 해야만 책 한 권의 필사가 끝이 난다. 철이 된 것일 뿐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다. 글처럼 하루 이틀쯤 아니 어느 때는 일주일쯤 묵혀 두었다가 필사본을 꺼내 복습을 한다. 그리고 일상에 적용해 실천하면 좋을 문장들, 글 쓸 때 도움이 될 만한 문장들, 평상시 궁금했던 질문들에 답이 될 만한 문장들에 밑줄을 긋고 내 생각을 적는다. 마음에 꼭 남기고 싶은 문장은 핸드폰 메모장에 있는 <사유해야 할 문장>이라는 폴더에 다시 옮겨 적는다. 필사한 걸 다시 옮겨 적으니 이중필사라고도 할 수 있다. 요즘 내가 읽는 책들은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


은유, 김숨, 한강처럼 한 작가의 책에 꽂히면 이 작가들에 대해 알고 싶어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찾아보는데 강의가 있으면 통째로 받아 적기도 한다. 필사의 진화라고나 할까? 관심 있는 작가들의 유튜브 강의를 노트나 그 작가의 필사본 뒷면에 받아 적는 새로운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말했다시피 악필이지만 이 정도 양쯤은 스스로에게 허용하기로 했다. 작가의 책만이 아니라 그 책에 대한 작가의 생각까지 필사하고 나면 ‘책 한 권을 깊이 음미했다.’라는 생각에 뿌듯했다. 이런 책들은 쉽사리 잊히질 않았다. 작가의 마음도 작가의 문체도 몸속에 알알히 박히는 듯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야 필사본은 책장 한 칸 한 칸에 연도별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다른 필사본들과 합해져 쌓여간다. 2021년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3년 차가 되었다. 첫해에는 읽고 있던 책의 인상적인 구절 몇 문장을 필사하는 것으로 가볍게 시작했다. 2년 차에는 지인들에게 "토론하는 모든 책은 다 필사하겠다."라고 공표한 후, 약속을 지키는 방식으로 필사를 이어 나갔다. 3년 차에는 가속이 붙었는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읽고 토론하는 모든 책을 필사하기에 이르렀다. 읽은 책을 필사하지 않으면 찜찜해서 다음 책으로 넘어갈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수북이 쌓여가는 필사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꼭 내가 낳은 새끼라도 되는 양 흐뭇한 기분이 든다. 직접 쓴 글은 아니지만 발췌한 문장 옆에 파란색 볼펜으로 내 생각을 적어나가면 마치 또 다른 창작물처럼 느껴진다. 원래 궁금한 게 많은 인간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 마음속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는 문장들이 보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필사를 하면서 가장 좋은 건 세상을 알아가는 즐거움이다. 원래 이런 거라잖아. 이래서 이런 거였어? 이래서 이런 행동을 하는구나 등등. 또한 한 문장 한 문장 필사를 하다 보면 저절로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되는데 이 사유의 시간이 좋다. 이 문장이 지금 내게 왜 와닿았는지 생각해 보면서 나에 대한 이해, 주변사람, 세상에 대한 이해로 뻗어나가기도 한다. 마음이 헝클어지고 심란한 날에는 필사를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한다. 한 문장 한 문장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어수선했던 하루도 단정하게 마무리되는 것 같다.  


지금 내 모습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내 세계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평상시 쓰는 언어들도 미세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평소 쓰지 않았던 단어들이 나도 모르게 툭툭 튀어나온다. 이런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것이 필사의 힘이리라. 글을 쓸 때에도 어느 책에 어떤 문장이  있는지 알게 되어 인용도 예전보다 한결 수월해졌다. 필사한 문장들 서로 콜라보를 하기도 한다. 김숨 작가의 『오키나와 스파이』를 필사하는데 『사피엔스의 한 문장이 떠올라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필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금세 휘발되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문장들이 A4 용지에 꾹꾹 눌려 담겨 있다. 필사본 뭉치를 꺼내어 세어보니 3년간 필사한 책이 96권이다. 1장짜리부터 많게는 62장짜리까지 다양하다. 가장 많은 양의 주인공은  바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다.

    

독서회 회원들에게 이주에 한 번 하는 독서모임 루틴을 바꿔 일주일에 한 번 『사피엔스』 토론을 하자고 제안한 건 나였다. 수많은 책들을 필사해 왔지만 필사본이 종이 형태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물론 마음속에도 남아 있다고 믿고 있지만 언제 휘발될지 모른다) 컴퓨터 파일에도 정리가 되어 있질 않아 항상 불안했다. 정리가 병인지라 이참에 필사한 책들을 정리해 글을 써보고 싶었다. 한참 미친 듯이 달렸더니 한 번쯤 멈춰 돌아볼 시간도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피엔스』가 첫 책어야 했다. 역사, 사회, 생물, 종교 등 학문의 경계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써 내려간 유발 하라리의 글은 '인류 역사를 이렇게도 바라볼 수 있구나'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뭔가 커다란 카테고리가 생긴 느낌이었다. 이제까지 읽은 모든 책들은 어쩌면 인류사에 있어서 파편적인 것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피엔스』부터 출발해 필사한 책들에 관한 글을 하나씩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필사한 문장들이 나의 일상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어떻게 녹아들었으면 하는지 글로 남기고 싶다. 글을 씀으로써 또 한 번의 필사를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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