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말들)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
“한 세월 살다 보면, 제법 잘 살아왔다고 여겼던 오만도,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겸손도 문득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그런 날이 오게 마련입디다. 그런 날, 그때가 되면 누구나 허우룩하게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그래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p.5)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간절한 시기가 찾아왔다. 요즘 내 삶의 화두는 개인주의였다. 개인주의의 뿌리에서부터 지금 시대의 개인주의 흐름까지 궁금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시작으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거쳐 송길영의 『시대예보: 핵 개인의 시대』 까지 이 세 권의 책 속에서 몇 달 동안 푹 잠겨 있었다. 읽고 필사한 후 글로 쓰면서 정답은 아닐지언정 나만의 답을 찾고자 용을 써왔다. 개인주의, 자유론, 시대적 흐름 등등 이런 이야기만 하다 보니 뭐랄까 사람이 점점 건조해진다고나 할까, 시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쩍쩍 갈라지고 바짝 마른 감정에 단비가 필요했다.
퍽퍽해진 내 마음을 독서회 동생은 어찌 알았을까? 그녀는 이번 주 토론 책으로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라는 부제가 있는 정재찬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추천했다. 아름다움과 낭만에 목말랐던 내게 딱 맞는 책이었다. 여러 달 목메고 있던 ‘개인주의’라는 삶의 화두에서 빠져나올 절호의 찬스다 싶었다. 다른 세계가 필요했다. 사람이 밥만 먹고살 수 없듯 밥이 아닌 것에서 허기를 채우고 싶었다.
그렇다면 내가 시를 좋아하나? NEVER. 공대생도 아닌데 시를 잊은 지 오래고 시를 사랑하는 방법 또한 배워 본 적이 없다. 시는 느끼는 거라는데 시 앞에서만 서면 한없이 작아진다. 시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해하질 못하니 재미가 없다. 10년 넘게 책을 읽어왔으면서도 좋아하는 시인이 한 명도 없으며 독서 모임에서 1년에 한 두 권 의무방어전처럼 읽는 게 전부다. 문학을 서열화하는 건 아니지만 문학의 최고봉이 시라는 데 ‘나는 왜 시와 친해지지 못할까?’ 주눅 들어 있다.
그래서 새해에는 시와 친해지리라 다짐을 한 후, 그나마 조금은 대중적인 시인들의 시집을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 읽으려 시도했지만 몇 페이지만 넘겨보다 읽지 않은 채 도서관에 반납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빌리고 반납하고 빌리고 반납하고. 시와 밀당을 하고 있는 건지 시를 일상에 들이는 과정인지 모르겠다. 아! 나라는 인간은 시라는 것과 애당초 맞지 않는 사람인가? 자괴감이 들 때 찾아온 책이 바로 『시를 잊은 그대에게』 다.
시를 잊은 그대이자 한 번도 제대로 시를 품어본 적이 없는 내게 저자는 와인 소믈리에처럼 “시라는 것은 이런 거랍니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는 시의 깊은 맛을 전하기 위해 가요와 가곡, 그림과 사진, 영화와 광고 등 다양한 재료와 스토리에 시를 버무린다. 시 앞에서만 서면 ‘이건 무슨 의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요.’ 스트레스받던 내게 사실은 그처럼 시와 나를 연결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시와 나 사이를 연결해 시라는 아름다운 세계로 안내해 줄 사람 말이다.
한 유튜브 강의에서 저자는 말한다. “저도 시를 공부만 했지 마음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40대 이후, 시에 덜컥 걸려들면서 ‘참 좋은 걸 공부하고 있구나!’ 알았다. 저만 알고 있는 건 잘못이라는 생각에 시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아니까 시를 전할 수 있겠다 싶었다. 라디오 사연 들으면 따라 울기도 하고, 그 사연에 맞는 음악 들으면 “저건 내 노래야” 하는데 “여태 시가 왜 그런 역할 못했지?” 생각했어요 . “저건 내 시야.”라고 말하면 우리가 덜 외로울 탠데 말입니다. 그걸 연결하고 싶었어요. ” 그는 그렇게 시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내게 전달한 “저건 내 시야”라고 말할 수 있는 시를 찾았다.
신경림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저자는 이 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우리는 삶이 비애라는 사실을 자주 잊고 산다. 그러나 '어느 밤'이 찾아오면, 비로소 고요한 침잠과 성찰의 시간이 오면, 그때야 깨닫게 된다. 산다는 것은 슬픈 것이다. 힘든 것이다. 허무한 것이다. 곧 인간의 유약함과 비애는 저 ‘바람’과 같은 시련 때문도 아니고, ‘달빛’처럼 하늘 높이 밝은 그 무엇을 지향하다가 얻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외적인 것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내면의 슬픔으로 인해 온몸이 흔들릴 따름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허무주의에 가깝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 자신을 성찰할 줄 모른다면 비애도 없다. 인간 존재의 모순과 그에 따른 불안, 자신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흔들리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인간은 더욱 성숙해질 수 있다.”(p.18-20)
첫 책을 출간해 작가 지망생에서 작가가 된 후, 지금은 그토록 바라던 삶, 읽고 쓰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음에도 헛헛할 때가 있어 당혹스러웠다. 작가라는 타이틀도 내 이름으로 된 책도 있는데 분명 예전보다 가진 게 많아졌는데 ‘이 헛헛함의 정체는 뭐지?’ 궁금했다. 이 감정의 정체가 바로 외적인 것과는 무관하게 흐르는 내면의 슬픔이라는 걸 이 시를 통해 알았다.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 산다는 건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알게 되어 위로가 되었다. 헛헛할 때가 다시 찾아와도 이제는 그리 힘들지 않으리라. 삶이란 그런 거라고, 인생이 원래 그런 거라고 내게 주문을 걸면 될 터이다. 이래서 시가 필요한가 보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야 하나 보다.
시와 나 사이에 그가 있다. 그로 인해 시를 잊고 살았던 내가 시에 한 발짝 다가선 느낌이다. 이 또한 시를 일상에 들이는 과정이리라.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을 일상에 들이는 과정이리라.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간다면 다음에는 주선자인 그 없이 바로 시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시’라는 비를 맞으니 이제야 좀 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