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 『코스모스』, 김초엽『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p.182)
10월 17일부터 시작해 두 달간, 일곱 번의 모임 끝에 12월 9일 『코스모스』의 마지막 토론이 있었다. 매주 두 장씩 한 사람씩 돌아가며 토론을 이끌었는데, 준비해 온 요점정리 프린트물에 메모를 하기도 하고, 책 속 문장에 빨갛고 노란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기도 하며 학창 시절로 돌아간 학생들처럼 공부하며 읽었다. 생소한 과학용어와 이해되지 않는 과학 이론들이 감당하기 버거웠으나 지금 우리들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건너뛰기로 했다. 느슨하게 읽지 않으면 완독이 불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육아가 한창인 마흔다섯의 동갑내기 여성 둘과 육아가 끝나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쉰셋의 동갑내기 둘은 그렇게 일곱 번을 만나고서야 이 책을 끝낼 수 있었다. 한 집에 독감이 돌아 한 주 쉬기도 했고, 내 경우에는 아들의 결혼식도 치러야 했다.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사느라 분주했지만, 이 기간만큼은 일상 한편에 ‘코스모스’라는 우주를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7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가장 와닿았던 건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본 나였다. 우주에는 약 2조 개의 은하가 있고 각각의 은하에는 약 1000억 개의 별이 있는데, 우리 은하의 별 중 하나가 지구라는 것. 나는 정말 이 거대한 우주 속 먼지 같은 존재구나! 정말 별거 아닌 존재구나! 나라는 존재뿐이 아니다.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우주적 관점으로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면 이 또한 별거 아닌 일이 된다. 별일도 아닌 일에 오늘도 목매어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모든 인간사는, 우주적 입장과 관점에서 바라볼 때 중요하기는커녕 지극히 하찮고 자질구레하기까지 하다.(p.36)”라는 칼 세이건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면서 말이다.
요즘 내 일상은 필사 생활자로서 두 번째 책을 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읽고 필사하고 필사한 문장을 일상과 연결하는 글을 쓰면서 두 번째 책 출간을 목표로 내달리고 있다. 내년까지 부지런히 읽고 필사한다면 내후년에는 두 번째 책을 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책을 낸 사람으로서 두 번째 책을 내야 한다는, 내고 싶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게 문제다.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감각만으로도 행복했던 사람이 첫 번째 책을 냈으니 어서 빨리 두 번째 책을 내야 한다며 스스로를 재촉하고 닦달하는 마음이 글 여기저기에서 일상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게 문제다. 조바심이 내가 가진 고유한 속도를 집어삼키며 등 떠밀며 앞만 보고 가라고 하니 가뜩이나 느린 사람인 나는 숨이 차기만 하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두 번째 책을 낸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닐 텐데, 집착하고 또 집착하며 하루하루 목매어 살고 있는 것이다. 그저 이 넓디넓은 우주에서 현대라 불리는 시대에 태어나 찰나를 살다가는 수많은 인간종 중 하나일 뿐인데 말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 끝에 찾아온 질문들. 그럼 이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어떻게 살다 가는 게 맞는 걸까? 천문학자 이명헌은 13장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가 연약한 지구를 사랑하고 대변할까? 결국 우리밖에 없다. 책 전체에 우주 이야기를 해 놓고서는 결국 사람 얘기를 한다. 칼 세이건은 우주 얘기 자체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우리가 같이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다. 결국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이 광활한 우주에 결국 우리밖에 없으니 외로운 우리들끼리 같이 연대해서 잘 살아 보자라는 이야기. 700페이지라는 긴 이야기를 통해 결국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였다.
내게 던져진 질문들도 마찬가지다. 바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를 다시 읽으며 힌트를 찾았다. “행성과 항성의 탐사가 계속될수록 인류 우월주의는 뿌리째 흔들리고 말 것이다. 그 대가로서 우리는 우주적 시야를 갖게 될 것이다.(p.677) ”라는 칼 세이건의 말은 우주적 관점으로 나라는 인간을, 내가 겪고 있는 인간사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그의 말은 분명 사고의 시야를 넓히고 높고 먼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우주 개발만이 답일까?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만이 답일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 과학 커뮤니터, 궤도의 ‘로켓의 역사’ 강연을 들으러 갔다가 지금 미국에서는 3일에 한 번 로켓 발사 실험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든 생각이었다. 3일에 한 번 로켓을 쏘아 올리고 있다고? 이틀에 한 번 쏘아 올리는 게 목표라고? 칼 세이건이 살아있었다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우주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기뻐했을지 모르지만 솔직히 이 소식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바로 옆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조차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또다시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붓고 있는 게 씁쓸하게 느껴졌다.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물론 우주 개발도 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행성에 사는 지구인의 목소리에 내 주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인류의 외연만 확장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답을 찾았냐고? 3일에 한번 로켓을 쏘아 올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채, 수많은 책을 도구 삼아 나의 외연만 확장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나 또한 책이라는 우주에 매일 로켓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곁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주의 깊게 듣지도 않으면서 넓디넓은 책이라는 세계의 개발에만 과도하게 몰두해 있었다.
내가 찾은 답은 나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로 곁에서 살아가는 가까운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로 했다. 경청하기로 했다. 시작은 매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다. 가까이는 남편부터 탁구장 회원들, 독서 모임 회원들, 친정엄마와 동생, 가까운 지인들까지. 귀를 열고 시간을 내어 줄 것이다. 마음을 내어 줄 것이다. 결국 온 우주를 돌고 돌아 내 옆 사람에게 당도했다. 이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 속에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줄이는 방법으로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로 했다. 참 많이도 돌고 돌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