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을 전업주부로 살았다. 육아를 하는 동안 독서 토론 모임을 나가기 시작했고 매주 한 권의 책으로 10년을 살았다.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평생 남의 책만 읽고 살 거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뭐라도 써야 할 것 같았다. 글을 써서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끊어 올랐다. 더 이상 책을 읽는 소비자가 아니라 글을 쓰는 생산자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전해 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작가라는 목표를 위해선 하루가 통째로 필요했다. 글을 쓰기 위해선 체력이 필요하니 갓 입문한 탁구를 통해 체력을 키우면 될 것 같았다. 낮에는 작가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에 사설 탁구장의 저녁반으로 시간대를 옮겼다. 그렇게 낮에는 작가 지망생으로 저녁에는 탁구 생활체육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글이라는 굴을 깊이깊이 파보리라 결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글 쓰는데 미친 시절을 보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변수가 생겼다. 나 자신과 약속한 글의 양과 필사의 양, 책 읽기, 토론, 글쓰기 방법론 공부 등 매일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어느 날부터인가 탁구란 놈이 자꾸 끼어들기 시작했다. 글을 쓰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필사를 하다가도 “아까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글쓰기에 미치고 싶은데 틈만 나면 탁구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성은 글쓰기를 외치고 몸과 마음은 탁구로 향해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탁구와 글쓰기 둘 다 서로 미친 시절을 보내겠다고 서로 난리였다. “야, 탁구, 너는 글쓰기를 위한 조연이라고. 저리 가 있으라고.”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탁구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중심을 못 잡고 한참을 휘청거리다 방법을 찾았다. 차라리 탁구 이야기를 쓰면서 글쓰기에도 탁구에도 미친 시절을 보내자고.
우선 탁구 관련 책들을 찾아봤다. 선수 출신 코치들이 쓴 탁구 기술책이 대부분이었다. 요가, 피트니스, 달리기를 하는 생활체육인들이 쓴 책은 많은데 탁구 에세이는 없었다. 황세진이 쓴 <아티스트의 탁구 노트>가 유일했다. 그마저도 5부로 시작한 저자가 2부로 승급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기에 탁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입문자로서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새내기 탁구인으로서 다른 탁구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과정으로 탁구를 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간 선배 생활체육인의 말이 듣고 싶었다. 그 혹은 그녀의 눈으로 바라본 탁구라는 세계가 궁금했는데 그런 책은 딱 한 권밖에 없었다. 다른 탁구인이 쓰지 않았다면 내가 한번 써 보리라는 무식함과 용감함을 탑재한 채 탁구에 대한 글쓰기는 시작되었다. 탁구를 하면서 궁금했던 온갖 질문들과 고민들을 가리지 않고 썼다. '그러면 이러한 질문들과 고민들 아래로 와글와글 모여 서로의 경험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잠깐만요. 그런데 5년밖에 안 된 탁구인이 탁구에 대해 뭘 안다고 책을 쓰나요?)
“5년밖에 안 된 네가 탁구에 대해서 뭘 안다고? 부수도 최하위 부수면서?”라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쓰고 있다고 하니 누군가는 “부수가 낮아서 문제다. 과연 사람들이 하위 부수의 글을 읽고 싶어 할까?”라는 말을 한다. 거기에 혹해 ‘책을 내기 위해서는 부수승급부터 해야 하나?’ 고민도 했다. 하지만 각 시기마다 그때의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설프지만 5년 차인 나만이 쓸 수 있는 글. 탁린이로 시작해 5년 차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그래서 내 수준, 내 위치에서 쓸 수 있는 글을 썼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썼는데요?)
원래 궁금한 게 많은 인간이다. 주변 사람들이 질문이 많아 피곤하다고 하기도 하고 집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질을 십분 활용해 탁구 기술뿐 아니라 탁구장에서 오가는 말, 행동, 감정, 심리, 인간관계 등 탁구에 관해 궁금했던 점, 고민했던 모든 것들을 가리지 않고 썼다. 탁구장에서 탁구만 치는 건 아니니까.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건 어디나 비슷하니까. 탁구에 관한 글을 쓰면서 미처 몰랐던 나를 알아가고 주변 사람을 알아가고 인생을 알아가고 있다.
(그런데 왜 탁구인들이 당신 책을 읽어야 하죠?)
이 글들은 탁구장에서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쓴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다. 내 이야기임과 동시에 탁구인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이야기이기도 하다. 탁구인들이 이 책을 통해 “나도 이런 거 궁금했는데, 나도 이런 고민한 적 있는데, 우리 탁구장에도 이런 사람 있는데 ”라는 공감대를 형성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탁구에 대한 생각, 사람에 대한 생각, 더 나아가 인생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 좋겠다.
탁구계에 "똑같은 구질의 탁구인은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대한민국 탁구 생활체육인 25만 명 중 한 명이다. 어디에선가 이렇게 탁구를 치는 인간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어디에선가 함께 뛰는 러닝메이트가 있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내가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공감과 위로를 받고 싶었듯이 누군가에게 이런 내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러니 당신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고. 5년 차 8부인 나도 썼으니 탁린이부터 시작해 70세 어르신까지 저마다의 탁구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고. 다른 생활체육인들의 운동 에세이가 넘쳐나듯이 탁구 에세이도 흘러넘쳤으면 좋겠다.
(이게 끝인가요?)
탁구에 관해 '끝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던 철없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뭐든 끝이 없다는 걸 탁구를 통해 다시 한번 알았다. 내가 다니는 탁구장에는 휴식 테이블이 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탁린이부터1,3,5,10,15,40년의 구력을 가진 탁구인들이 눈을 반짝이며 탁구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한다. 탁구로 대동 단결한다. 매일 이야기하는데도 질려하지 않는다. 이런 눈들의 반짝임이 좋다. 이런 눈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뭔가를 이리도 오래 좋아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40년이 지났는데도 탁구가 재미있다고 한다. 무슨 매력이 있길래? 그 이유가 궁금해 탁구에 관한 글을 계속해서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전 코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20년 탁구를 쳤는데 이제야 탁구가 뭔지 조금 알겠다.” 그러니 끝난 게 절대 아니다. 나는 이제 막 탁구라는 세계에 한발 발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