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등 때 밀어주기' 제안은 나를 또 작가의 서랍 앞에 앉혀 놓았다.
혼자 목욕탕에 다니다 보면 '등 때 밀어주기' 제안을 종종 받는다. 여태껏 몇 번을 받았는지는 애써 셈하지 않아 숫자로 표기할 수는 없지만, 홀로 목욕탕을 다니는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익숙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브런치 작가의 서랍을 열게 한 데는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 브런치에서 풀 뜯어먹으려고 앉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제의 제안은 겪어보지 않은 일임은 분명하다.
세신사님께 "때밀기"를 하지 않는 날은 패턴이 비슷하다.
"한 명이요" 목욕탕 입구에서 목욕비를 지불하고, 건네주는 수건 두장을 들고 입장한다. 열쇠가 매달린 사물함을 열어, 수건 한 장을 넣어놓고, 소지품을 넣은 가방을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옷을 훌훌 벗어제끼고, 남은 수건 한 장과 열쇠, 목욕가방을 들고 탕 입구로 걸어간다. 일단 여기서 한번 멈춤.
탕 입구 앞에 놓인 정수기 앞에 서서 준비한 텀블러에 카누 아메리카노 두 개를 뜯어 넣고, 뜨거운 물을 약간 담은 다음, 제빙기를 열어 얼음을 잔뜩 넣어 목욕가방에 올려놓는다. 이어 산발한 긴 머리를 질끈 동여 매고 체중계에 올라간다. 46.21kg. 지난주와 비슷한 몸무게. 안도하며 탕 안으로 들어선다.
수증기로 자욱한 탕 안으로 들어서면, 빈자리부터 스캔한다. 마땅한 자리를 찾아, 목욕가방을 내려놓고 샤워기 수압을 체크한다. 수압이 적당하고, 막힌 구멍 없이 일정하게 물을 뿜어대는 샤워기인 것을 확인하면 목욕의자에 수건을 켜켜이 접어 올려놓는다.
그제야 큰 대야와, 작은 대야를 샤워기가 매달린 수도꼭지 아래에 가져다 놓고, 노란 때타올과 파란 때타올, 전신타올을 큰 대야에 넣어 놓는다. 이제부터 여기가 '내 자리'. 여탕에서 주인 있는 자리인지 아닌지는 수도꼭지 아래에 놓인 대야에 물건이 놓여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하기에 무엇이든 넣어놔야 한다.
목욕가방에서 칫솔과 치약을 꺼내 양치질부터 시작한다. 양치질을 하며 샴푸, 트리트먼트, 폼클렌징, 바디워시를 주섬주섬 꺼내놓는다. 양치질이 끝나면 질끈 동여맨 머리끈을 풀어 대야에 넣어놓고, 머리를 감기 시작한다. 샴푸를 한 후 단백질 헤어트리트먼트제를 개털 같은 머리카락에 듬뿍 도포하고, 다시 질끈 묶는다.
폼클렌징으로 세안을 하고, 바디워시로 전신을 씻어 내린 후 묶은 머리를 또다시 풀어 미끈거리는 머리카락을 씻어낸다. 단백질이 스며든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똥머리로 만든 후 묶어 정수리에 올려놓는다.
이제 탕에 들어갈 차례. 엄마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새벽 첫 탕의 맑은 물을 좋아했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물은 물이지. 하지만 탕 위를 부유하는 이물질은 거슬려 작은 대야로 물 위를 걷어내고 들어간다. 개 뜨겁다.
모가지 아래까지 푹 담가야 때밀기가 좋은데, 너무 뜨겁다. 간신히 가슴팍 아래까지 담가보지만 5분을 버티지 못하고 탕 밖으로 나온다. 맡아놓은 '내 자리'로 돌아가 팔부터 밀어제낀다. 팔하나 밀었을 뿐인데 벌써 지친다.
'기본세신이라도 할걸 그랬나?' 급 후회가 밀려오지만 이미 밀어 제낀 한쪽 팔이 아까워 힘을 낸다. 남은 팔을 밀고, 가슴을 밀고, 쇄골과 모가지를 밀고, 가슴을 들어 올려 배를 민다. 개 힘들다. 텀블러를 열어 커피를 마신다.
다시 힘을 내어, 허벅지를 민다. 허벅지부터 시작해 종아리를 타고, 아킬레스건까지 간다. 이때 잠깐, 목욕가방에서 풋파일을 꺼내 발뒤꿈치 각질을 제거한다. 갈라짐 없이 반들반들해지면, 풋파일을 내려놓고 발등, 발가락까지 꼼꼼히 민다.
거의 다 왔다. 한 손에만 끼웠던 때타올을 양손에 끼고 벌떡 일어난다. 수도꼭지 아래 놓여있던 대야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다리 한쪽을 올려놓는다. 이번에는 뒤쪽 허리부터 엉덩이를 거쳐 허벅지로 내려오며 때를 민다. 반대 다리를 또 올려놓고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심히 솟아오른 꼬리뼈까지 세심하게 밀고 나면 손에 낀 때타올을 뺀다.
난 너무 지쳤다. 포도향 가득한 바디스크럽을 꺼내 전신에 처바르고, 긴 극세사타올로 문지른다. 손이 닿지 않아 밀지 못했던 등판은 이때 타올로 쓱싹쓱싹. 극세사타올을 치우고, 긴타올을 꺼내 바디워시를 짜내어 다시 문지른다. 몽글몽글한 거품을 몸 위에 남겨 놓고, 면도기를 꺼내 든다. 겨드랑이, 종아리, 허벅지, 팔까지 제모를 한 후 샤워기를 들어 거품을 씻어낸다. 똥머리도 다시 풀어놓는다.
마지막으로 머리에 린스를 한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 샤워를 하고, 앉은자리를 정리한다. 목욕가방을 뒤엎어 씻은 뒤 차곡차곡 물건을 정리하고, 앉아있던 의자의 수건은 걷어내어 물로 헹군다. 사용한 의자와 두 개의 대야는 슥슥 물을 뿌린 다음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나오는 길에 스탠드샤워기 앞에 서서 다시 따뜻한 물로 전신샤워를 하고, 찬물로 물을 뿌려 열려있던 모공을 닫는다.
이렇게 나의 목욕은 끝이 난다.
제목에 있는 '등 때 밀어주기' 제안은 언제 받는 거니?"넌 참 수다스러워" 오창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목욕탕 얘기만 나오면 신이 나서 서론이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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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밀어주기' 제안은 대체로 상반신을 밀고 지쳐 커피를 마실 때나, 짧은 팔을 뒤로 꺾어 올라가지 않는 팔을 반대손으로 받치며 간신히 날갯죽지까지 올려 등을 밀어보지만 때밀기는 실패하여 세상 다 잃은 얼굴로 멍 때리고 있을 때 자주 받는다.
"등 같이 미실래요?"
이 말을 들을 때는 전조 증상이 있다. 함께 온 지인이나 자식 없이 혼자 오신 어르신이 내 옆이나 뒤에 계시면 가능성이 높다. 가능성이 높다 하여 다 부탁을 하시지는 않는데, 때를 미시며 "혼자 왔어요?"를 시작으로 샴푸향이 좋다는 둥, 피부가 까맣다는 둥, 한 마디씩 건네는 분은 틀림없이 '등 때 밀어주기'를 제안하신다.
혼자 오셨다고 다 그러신 건 아니고, 이 목욕탕에 자주 방문하지 않고 가끔 오시는 분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목욕탕에 자주 방문하는 분들은 이미 서로 안면이 있고, 친한 분들이 많아 서로서로 등 밀어주기 품앗이를 한다. 나는 안면은 있지만, 친한 상태는 아닌 데다 내 등을 맡길 만큼의 넉살 좋은 사람도 아니라서, 품앗이에서는 제외된다. 이렇게 품앗이에서 제외된 사람들끼리 앉아 있다 보면, 또 다른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핑크색과 흰색을 조합한 스트라이프 무늬의 헤어타올을 이쁘게 감싼 채 어제 내 뒤에 앉아계시던 이분은, 목욕탕 고정 멤버로, 이미 본인의 등을 밀어줄 품앗이 지인이 계셨다.
"나는 더 불릴 거야. 자기는 지금 밀어줄까?"_ 품앗이 지인
"아니. 나도 조금 더 불리고. 그럼 이따 등 밀고 싶을 때 불러."_ 핑크 헤어 타올
발가벗은 몸에 같은 헤어 타월을 걸친 두 분은 내 앞에서 이렇게 대화를 나누셨다. 나는 이 대화를 한자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큰소리였고, 바로 옆에 있었기에. 두 분의 대화와 상관없이 나는 있는 힘을 짜내 노란 때타올로 허벅지를 밀고 있었다.
"등 밀어드릴까요?"_ 핑크 헤어 타올
"괜찮습니다" _ 나
공손히 대답은 했지만, 혼란스러웠다. 이미 밀어줄 분이 계신데 왜그러시지? 뭐지?
"등 밀어드려요?" 나도 몸을 돌려 여쭈었다. 이미 품앗이 지인이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예의랄까?
"괜찮습니다" 핑크 헤어 타올을 쓰신 분도 공손히 거절하셨고, 우린 등을 돌려 남은 때를 밀기 시작했다.
딸 같아서 밀어주신다고 하셨나? 기껏해야 열 살 정도밖에 차이가 안나 보이는데? 동생 같은가? 세상 다 잃은 얼굴로 때 미는 게 안쓰러웠나? 몇몇 경우의 수를 생각을 해보다 말았다. 때 미는 건 너무 힘드니까.
두 손 두 발 멀쩡하고, 혼자서 몸뚱이를 밀 기운도 있지만 세신사님께 몸을 맡기는 "마개 빠진 년". 그게 바로 나다. 온탕에 몸을 담그고 나와 때를 미는 그 힘듦이 싫어, 힘을 쓰지 않고 돈을 쓰는 년이 바로 나다. 이런 내게 '등 밀어주기' 제안은 달가울 리 없다.
매우 매우 매우 달갑지 않은 제안이지만, 혼자 오신 어르신들의 등은 사양 않고 먼저 밀어드린다. 어르신이 가져온 타올을 손에 끼고, 세신사님이 내게 물어보듯, 이 정도 압력으로 밀면 되는지 여쭈어 본다. 괜찮다고 하시면, 목 뒤서부터 양어깨, 넓은 등판을 지나 허리까지. 마지막으로 날개뼈가 있는 견갑골을 지나 팔뚝 아랫부분까지 밀어드린다.
"야무지게 잘 미네"를 시작으로 "아이고. 됐어요" 팔뚝 아래를 밀 때까지 이 얘기를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른다. 세신사님께 밀어봤던 경력이 쌓여서인지, 내가 생각해도 야무지게 잘 밀어드리긴 한다. 샤워타올에 바디워시를 묻혀 등허리를 문질러 드리면 '등 밀어주기'는 끝이 난다.
이제는 어르신이 내 등을 밀 차례. 하지만 나는 내 등을 내어드리지 않는다. "저는 밀었어요" "저는 세신사님이 밀어주신대요" 이 말을 들으면 어르신들 어리둥절이시다. 밀었는데 왜? 신세 지기 싫은데 왜? 속에서 하시는 말씀이 들리지만 안 들린 척한다.
젊은 나도, 온도도 높고 습기가 가득찬 곳에서 때를 미는 게 이렇게 힘든데, 어르신들은 얼마나 더 힘드실까라는 생각도 있고, 내가 이렇게 밀어드리면 언젠가 우리 엄마가 홀로 때밀기를 할 때 누군가 나처럼 밀어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다.
심장수술로 가슴팍 한가운데 20cm가 넘는 긴 흉터를 가진 우리 엄마는 이제 결코 목욕탕에 가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낯선 타인에게는 절대 부탁 따위는 하지 않을 성향이라는 것도알고있지만, 그래도 난 어르신들의 등을 밀어드린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먼저 나서서 "등 밀어드릴게요"라고 말하지는않는다. 두 손 두 발 멀쩡하고, 혼자서 몸뚱아리를 밀 기운도 있지만 세신사님께 몸을 맡기는 "마개 빠진 년!"이니까. "등 같이 밀래요?"라는 어르신들의 제안을 받았을 때만 야무지게 밀어드린다.
엄마와 함께 목욕탕을 다니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딱 한번 엄마의 등을 밀어드렸다. 심장 수술 후 한 달 만에 샤워가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 엄마는 내게 때밀기를 부탁하셨다. 수술자리에 물이 들어갈까 무서워 가슴팍에 방수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이고, 집에서 샤워를 했는데 머리감기부터 때밀기까지 신속히, 능수능란하게 처리했다. 돈도 써본 사람이 쓸 줄 안다고, 역시 때도 밀어본 사람이 밀어줄 줄도 안다.
여전히 엄마 몸은 뽀얀 했다. 엄마는 하얀데 나는 왜 까매? 어릴 적 목욕탕에 갈 때마다 했던 질문을 다 커서도 했다. "너는 아빠 닮아서 그래" 엄마도 똑같이 대답했다. 야들 거리던 엄마 몸도, 탱글거리던 내 몸도 이제는 사라져 한없이 서글펐지만, "마개 빠지 년!"이 되어 돈 쓴 보람은 있었던 날이었다.
목욕탕을 참으로 좋아하는 나는 목욕탕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한다. 수많은 생각들 중 언제나 일 순위는 "마개 빠진 년!"인데, 어쩌면 "마개 빠진 년!"들을 보며 들릴락 말락 욕을 하던 엄마와 같이 오던 목욕탕이 그리운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노년의 어르신을 모시고 오는 나이 든 딸들이 나는 너무 부럽다.
다음 주는 청남대 사우나를 갈 예정이다.
"엄마. 나 오만 원만 줘!"
2023년 01월 08일 월요일_ 이번주 방문한 목욕탕은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세신사님이 계시는 청남대사우나가 아닌 서초목욕탕이었다. 이곳은 목욕비가 7,000원. 청남대사우나보다 1,000원이 싸다. 새집으로 이사 가기 전에는 이곳에 다녔는데, 이사 가기 전 동네목욕탕이기도 하지만, 현재 회사 근처기도 하여 나 홀로 때밀기를 할 때는 가끔 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