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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나린 Apr 29. 2023

남의 불행을 먹고사는 직업

< 사명감으로 포장된 욕심 >

"너는 왜 기자가 됐어?"

현직에 있을 때도, 그 직업을 스스로 포기한 뒤에도 수없이 들었던 질문이다. 나는 여전히 명쾌한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세상을 바꾸는 작은 힘이 되고 싶다'거나 '약자의 편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고 싶다' 같은 사명감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냥 글로 먹고는 살 수 있고, 사회적으로 그럴싸해 보이는 그런 직업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내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를 다 하고 싶단 뻔해서 재미없고, 가식적이어서 오글거리는 소리를 내놨다. 그 뻘소리에 듣는 사람도 비웃음을 참지 못했겠지.


실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기자를 본 적이 있다.

어릴 적부터 진로희망은 기자였고, 마침내 이 직업을 갖게 돼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의 눈에서는 빛이 났다. 내심 그가 부러워 경외감마저 들었다.


수습 딱지를 뗀 뒤 본격적인 사회부 생활에 익숙해졌다. 음주교통사고, 소니, 절도, 강도, 폭행…. 수많은 사건사고가 스쳐갔다. 매일 반복되는 사건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내야 했다. 음주단속을 피해보겠다고 오토바이와 승용차를 나눠 타고 첩보작전을 벌이다 나란히 잡힌 부부, 단속 경찰관에게 5만원짜리 지폐를 쥐여주고 소리 지르며 도주하다 잡혔다는 중년 남성, 시내버스 기사가 승객과 싸우다 씩씩거리며 그대로 버스를 몰고 경찰서로 온 사연 같은 것들.

그런 사건의 파편들을 주워들을 땐 소소하게 재미도 있었다. 나 혼자만 알고 있을 땐 더 짜릿했다.

'내일 아침 신문을 보면 다들 깜짝 놀라겠지?'

하루는 반복되고, 사건도 반복되고, 1년이 지났을 땐 웬만해선 감흥을 느끼기 힘들었다.






사고는 유난히 금요일에 자주 발생했다. '금요일의 악몽'이란 말이 따라붙었다. 주말을 앞두고 들뜨는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악몽이다.


그날도 금요일이었다. 햇살은 뜨겁고 바람은 살랑이는 전형적인 초여름 날씨였다. 일간지 신문기자의 휴일은 남들보다 하루 일찍 시작해 하루 먼저 끝나는 탓에 금요일과 토요일이 주말이 된다.

그러니 그날은 나의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오전이었다.

'석유화학공단 □□사업장 폭발. 사상자 다수.'

주섬주섬 짐을 챙겨 현장으로 뛰어가는데, 심장은 더 크게 뛰었다. 쿵쿵 울리는 심장 박동이 귓가에 맴돌았다. 머리가 울려 뇌가 뛰는 것 같았다.


현장은 예상보다 더 참혹했다. 들것이 더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생명의 흔적을 싣고 나올 때마다 누군가가 울부짖었다. 온몸으로 울다 쓰러지는 중년 여성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셀 수 없이 날아들었다.

나는 펜을 들어 수첩에 휘갈겼다.

'20대 남성 주검, 모친 추정 여성 혼절.'

그러면서 생각했다. 기사의 첫 머리글을 어떻게 쓸까. '아비규환'이라는 단어보다 더 나은 말이 없을까.


현장에서 더는 건질 게 없다고 판단되면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다음 장소를 물색해야 한다.

빈소가 차려질 병원 장례식장에는 백업 나온 다른 기자가 이미 나가있었다. 사망자 1명이 옮겨진 병원이 비어있었다.


어수선한 병원의 틈새를 뚫고 걷다 보니 어느새 안치실 앞이었다. 현장에서 본 중년 여성이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힘을 끌어 모아 중력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듯.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앉아 그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안녕하세요. 신문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제 아들이…. 오늘만 하고 그만둔다고 했는데…."

갑작스런 이별 앞에 횡설수설하는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내 손을 쥔 그의 두 손이 바들거렸다. 나는 그의 손을 더 세게 부여잡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박스 기사로 써야겠다. 아, 이 와중에, 난 사이코패스인가.






해가 바뀌었다. 그동안 몇명의 수습기자들이 들어왔다 나갔고, 몇명은 수습 딱지를 뗐다.

그날은 예고된 자연재해에 예기치 못한 죽음과 마주한 날이었다. 도심을 삼켰다 뱉은 태풍은 젊은 청년 소방관의 목숨도 앗아갔다.

수습기자를 장례식장으로 보냈다. 상황을 지켜보며 보고라고 지시했다. 큰 기대는 없었다. 누군가와 인터뷰를 할 수 있다면 괜찮은 능력이라 여겼다.


몇몇 현장을 둘러본 뒤 어떤 기사를 얼마나 쓸 것인지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홀로 그곳을 지키고 있었을 수습기자가 걱정돼 전화를 걸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장례식장에 있기 힘들어서 저 나왔어요."

뒤통수를 때려 맞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냐는 질문에 그는 근처 버스정류장이라고 했다.

"다른 기자들 다 장례식장에 있지 않아? 너 혼자 아무 보고도 없이 나오면 어떻게 해? 당장 들어가."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구조활동을 벌이다 숨진 젊은 소방관은 나이 든 소방관의 아들이었다. 자신을 보며 소방관이 된 아들이 자신보다 앞서 떠났다는 비보에 아버지는 멍하게 주저앉다.

아들의 친구들이 현장에 모인 기자들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취재를 자제해달라고.

아버지 대신 친구들의 심경을 받아적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입을 빌려 사연을 정리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수습기자의 경솔함을 타박했다.

"그게 네 일이야. 거기서 물러서면 안돼."

이렇게라도 사연을 알려야 숨진 소방관을 동정하는 여론이 모이고,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예를 들면 순직 처리 같은.


그날 저녁 수습기자의 행동에 분개하는 내게 누군가 말했다.

"네가 뭔데? 그 사람들이 싫다잖아."

무리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이유를 '사명감'이란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구차하게 늘어놓은 변명들이 꼬여 궤변이 됐다. 허술한 모래성은 그의 한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냥 네 욕심 때문이잖아. 거창한 이유 좀 그만 갖다붙여."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먹고 살고 있었다.

내 직업은 불행이 있어야 존재의 의미를 평가받았고, 내가 쓴 글은 또다른 갈등으로 이어져야 빛을 봤다. 나는 늘 누군가의 아픔을 양분으로 삼아 직업적으로 성장했다.

누구도 내게 그렇게 할 권한을 준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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