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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나린 May 03. 2023

고스톱과 봉투

<  구태의 관습과 침묵 >

구석진 기자실에 지박령처럼 박혀 있는 기자들의 타이핑 소리가 공허해질 때 즈음, 중년의 기자가 한숨을 내뱉었다. 정년이 몇해 남지 않은 그는 지나온 세월만큼 허옇게 센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예전엔 말이야, 이 기자실에서 담배 물고 고스톱을 쳤는데 말이지. 그때가 진짜 따뜻했는데."

그가 '추억'이라 말하는 관공서 기자실에는 공무원들이 돌아가며 기자들과 고스톱을 쳤다고 했다. 지갑을 두둑하게 채워 참전했다가, 적당히 눈치껏 잃어주고 떠나는 게 그 시절의 센스였을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은 박봉이었다. 방송사나 중앙지의 사정은 조금 다르겠지만, 내가 몸 담았던 지역일간지는 그랬다. 수습기자의 월급은 최저 수준에 맞먹었다. 취재비는 별도로 지급되지 않았고, 식비와 교통비는 명목상 비과세를 위해 월급에 녹아들어 있을 뿐이었다. 밖에 나가서 돈을 뜯어오라는 식의 사이비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월급의 이면에는 '너네는 밥값이 안 들잖아'하는 인식이 깔려있었다.


수습기간을 마친 뒤 출입처를 배정받을 때, 고려되는 몇가지가 있다. 저연차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기사의 무게감, 출입하게 되는 관공서의 효율적인 동선, 그리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출입처.

회사도 책임지지 않은 기자의 점심식사를 출입처가 담당하는 아이러니다. 밖으로 내돌려지는 출입처를 맡고 있을 땐 "너 밥은 어디서 먹냐"는 질문도 으레 따라붙었다.






명절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간사가 기자실로 돌아오더니 대뜸 봉투를 건넸다. 명절에 떡값하라고 누가, 어디서 주더라는 말을 덧붙였다. 다들 받는 거라며 머뭇거리는 내 손에 쥐어줬다.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선배 기자에게 털어놨다.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앞으로 종종 받을 텐데, 그냥 괜찮아."

그 뒤로도 간사를 통해 상품권과 현금이 든 봉투가 전달됐다. 그것이 간사의 역할이라 떠밀리던 시절이었다. 봉투의 두께가 능력으로 갈음됐다. 기자단에 속한 기자에게만 주어지는 봉투는, 그곳에 소속되지 못한 기자를 차별하는 횡포가 되기도 했다.

나이가 지긋한 기자는 "올해는 좀 되네?"라며 만족어린 농담을 던졌다. 그를 바라보고 선 젊은 간사의 눈에는 부끄러움과 불편함이 서렸다.


시간이 흘러 40~50대가 떠나고, 갓 수습을 뗀 젊은 기자들이 기자단의 자리를 채웠다.

저녁 간담회가 있던 날, 출입처 관계자가 '대리비' 명목의 봉투를 간사에게 들려 보냈다. 기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미 받아버린 봉투를 어찌하지 못하고 간사가 발을 동동 굴렀다.

불편한 눈치와 침묵을 깨고 한 젊은 기자가 "저는 괜찮아요"하고 자리를 떠났다. 다른 기자들도 하나둘씩 봉투를 외면하고 식당을 나섰다.

뒤로 남은 간사가 느낄 민망함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내일 출입처에 고스란히 돌려주면 될 봉투지만, 이미 터져버린 수치심까지 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함께 한 귀갓길, 어깨가 처진 그를 향해 나는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핀잔을 늘어놨다.

"선배, 그걸 왜 받아와요? 나 같으면 안 받았다."

한참을 묵묵히 듣고 있던 그가 나지막한 한마디를 뱉었다.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냐."

취기에 기대어 쏟아낸 말의 가시가 그를 찌르고 내게 되돌아왔다.

나 또한 구태의 악습에 침묵하며 죄책감이란 감정을 애써 잊고 있었던 것을. 고고한 선비인 척.

내 스스로를 자책하고 비난할 용기는 없으면서, 비겁하게 그에게만 침을 뱉어냈다.






김영란법이 등장하면서 봉투 같은 노골적인 수단은 사라졌다. 누군가는 "김영란 때문에 살기 팍팍해졌다"며 투덜거렸고, 다른 이는 "속이 다 편하다"고 후련해했다.

김영란법은 회사에 현실적인 식대를 지급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핑곗거리가 됐다. 더이상은 밖에서 식사와 차 대접을 받기 힘들다는 이유에 회사가 반박할 카드는 없었다. 경영상의 어려움을 들어 최소한의 인상안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법은 느슨했고, 현실은 촘촘했다. 매번 기자들의 점심식사를 책임지던 출입처의 관행은 사라지는 듯하더니 몇달만에 은근슬쩍 부활했다. 농산물로 포장된 선물이 봉투 자리를 대신했다. 노골성이 감춰지는 만큼 마음의 무게는 덜어졌고, 거절의 횟수는 줄어들었다.

행태와 방식을 바꿔가며 몇해를 걸쳐 주고받는 행위는 출입처와 기자단의 관계를 돈독하게 했다.

또다른 의미로는 기사를 쓰는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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