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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랑 제주도 한달살기? 한달죽기?

그것은 숭고한 한달죽기였다.

by 마마멜



제주도 한달살기를 다녀온지 두 달,

그때의 기록을 글로 남기려고 남편에게 도움을 구했다.

식탁에 나란히 앉아 맥주 한캔씩 올려 놓고 물었다.


"제주도 한달살기 하면서 좋았던 점, 힘들었던 점, 그냥 막 쏟아내보자.

그럼 먼저 좋았던 점부터?"


...

약 10초간의 정적...


"아니, 그니까 좋은 게 없었던 게 아니라.."

남편이 허둥대며 입을 뗐다.

둘 다 아주 크게 웃었다.


한달살이 다녀온 뒤 주변에서는

진심으로 부러워하며 어땠는 지 궁금해 했다.

기대의 눈빛에 부응하고 싶어 대답했다.

"정말 좋았어요."

"뭐가 제일 좋았어요?"

"음..."

바로 떠오르는게 없어 "아기가 제일 좋아했어요"

하고 얼버무리다 그냥 진실을 알리기로 했다.

"좋았는데요.
아기랑 남편이랑 24시간 붙어 있는건..
한달살기 아니고 한달죽기 던데요?"

다들 웃으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우리 가족의 소중한 경험을 살짝 폄하한게 마음에 걸리지만

좋았던 것과 별개로 진짜 힘들었던 건 사실이다.


"아기 낳으면 행복해요?"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도 비슷한 결이랄까.


어쨌든 남편과 잠깐 10초 묵념을 한 뒤,

(그 때의 고군분투했던 우리에게?)

한계를 시험당하듯 힘들었던 그 시간이

매 순간 살아있는 기분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느새 다음 한달살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를 보며

제주도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써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EP1. 좋았던 점.



어딜가든 푸르고 초록였던 제주.


마당이 있는 집을 구한 우리는 눈을 뜨자마자

초록 잔디가 보이는 마당 툇마루에 앉아 멍을 때렸다.

쉬지 않고 돌아다니던 18개월 아기도

이 시간만큼은 우리 옆에 가만히 앉아 있곤 했다.

잔디 위를 나풀거리는 노랑나비들,

아기가 뜯어 불어도 다음 날이면

또 다시 솜뭉치를 가득 채워 피어나는 민들레씨.

매일 아침 내복바람으로

시골 동네 구석구석을 산책하며

아침이면 활짝 펴있던 연꽃이 해가 지기도 전에

이르게 진다는 것도 알았다.


제주의 시내는 바다 가까이에 있어서

차를 몰고 나갈 때마다 한라산 능선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완만한 내리막길을 달렸다.

내리막길을 따라 끝없이 보이는 연두색의 청보리밭,

멀리 도로의 맨 끝 푸른 바다와

그 위에 서있는 풍차를 볼 때마다

육아의 고단함도 완전히 잊고 "저것좀 봐!" 하며 서로를 불렀다.


나는 일주일에 세번, 아침 달리기를 이어갔다.

밭길을 따라 달리면 명상이 따로 필요 없었다.

어디서든 보이는 초록색과 푸른색.

그 시간은 유일하게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고,

내가 나로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지금 이순간을 알아차리기에 최적이었다.



매일 도전'당'하는 기분,

지나고 나니 오히려 좋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우리는 하루 두번씩 외출을 했다.

아침 7시쯤 아기가 깨면 다 같이 오름에 가거나 박물관을 갔다.

점심쯤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아기 낮잠을 재운 뒤,

아기가 일어나면 다시 바다로 나갔다.


하루 세끼 식사준비
두 번의 외출 준비
종종 사고치는 우리 강아지 뒷수습
남편과 나의 양쪽 어깨를 다 가린 무거운 짐들
재접근기 아기의 땡깡.


가진 체력을 모두 끌어다 쓰고, 피곤에 예민해진 상태에서

우리 부부는 부딪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매일매일 시험에 드는 것 같다.


동시 육아휴직 후, 많이 부딪쳤던 우리였지만

제주살이 한달동안은

서로를 어여쁘게 여기며 전우애를 길렀다.


"순간순간이 도전이었고, 우리는 어떤 새로운 경지에 이른거 같아"


내가 꼭 가보고 싶었던 새별오름에 간 날이었다.

가까이서 본 오름은 눈앞에 거대한 원뿔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이 가파랐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가보자!"

내 말에 남편이 당황하며 말했다.

"정상까지 올라간다고?"


나무한그루 없는 오름에 내리쬐는 뙤약볕을 그대로 맞으며

뒤돌아 보면 아찔할 정도의 가파른 오름길을

20분 정도 아기와 걸어 올라갔다.

한참 계단과 사랑에 빠져있던 18개월 아기는 그저 즐거워했다.

"우리 아들에게 끝까지 해내는 걸 보여주고 싶어."라는

압박 멘트가 먹혔는지, 남편도 입은 꾹 다물었지만 끝까지 함께 올랐다.


이날을 떠올리며 남편은 정말 화가 나서 내려가 버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마음을 달리 먹고 끝까지 오르는 데 집중했는데

내려오고 나니 오히려 새로운 경지에 오른 듯 했다고 어이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 때 약간 눈이 돌아서 "다음 도전은 뭘까?" 하던 남편이 떠올랐다.


제주도에서 이런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다.

해가 쨍쨍한 날,

아기와 강아지, 무거운 텐트와 온갖 짐을 이끌고

뜨거운 모래사장을 한참 걸어 겨우 해변에 도착했지만

텐트와 씨름하다 결국 펴지 못하고 다시 짊어지고 돌아온 날.

평소 같았으면 짜증 내며 아무 말도 않거나

싸우고 말았을 텐데, 그날도 우리는 서로를 보듬으며

또 어떤 새로운 경지에 함께 이르렀다.



우리의 한달살기는 숭고한 한달죽기였다.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마주하고,

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 모든 게 가능했던 건,

한없이 품어주며 나를 돌아보게 하는

제주의 자연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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