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그거 어떻게 즐기는 건데요?
17개월 아기와 제주도 한달살기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어린이집이 없다는 것이다.
어린이집을 보내며 이미 매일 일정한 자유 시간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다시 24시간 가정보육 미션이 떨어진 것이다.
이는 곧 주말이 15번 연속되는 것이고, 다가오는 10여일의 추석 연휴가 3번 연속되는,
바로 그 두려움 맞다.
게다가 내 살림이 아닌 곳에서 세 끼 식사를 챙기고, 놀아주고, 씻기고, 재우려니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제주에 도착하고 한달살이의 설렘은 찰나였고, 하루 이틀 지나면서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안일과 육아는 똑같이 하는데 열심히 제주를 만끽해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생겨버리니 초반엔 좀 힘들었다.
자연을 즐기러 왔는데요,
어떻게 하는건데요?
더 어려웠던 이유는 아기에게 자연을 만끽하게 해주고 싶어 왔는데 도시 촌뜨기 가족은 그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다.
흔한 키즈카페, 놀이터 하나 없는 제주도의 시골집과 주변 동네. 믿을 거라곤 푸른 잔디가 펼쳐진 넓은 마당이었다. 처음엔 공이나 모래놀이를 내놓아 보았지만 아기의 흥미는 잠시였다.
도시의 쇼핑몰, 키즈카페, 번쩍거리는 거리에 적응된 아이에게 조용한 풀밭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나무처럼 변화없는 시골 풍경이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부모인 우리도 낯설었다.
서울에서는 대체로 안전이 보장된 막힌 공간 안에서 놀았다면, 이곳에는 끝없이 펼쳐진 풀숲과 나무, 연못, 도랑, 까칠한 현무암이 있었다. 처음에는 눈을 뗄 틈 없이 아이를 쫓아다니며 조심시켰다.
산책이 보여준 자연
제주도 한달살기를 계획했을 때부터 “자연을 즐기자!” 이 생각 하나로 왔는데 우리가 이리도 촌스러울 줄이야. 아기를 자유롭게 자연 속에 풀어주고 싶었지만 불안했다.
일단 매일 아침 집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연꽃으로 덮인 큰 연못이 있었다. 첫 산책 때는 아기가 연못에 가까이 갈 때마다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가까이 가면 안 돼!” 하며 붙잡았다.
하지만 매일 아침 걸으며 우리도, 아이도 조금씩 달라졌다.
제약 없이 무아지경으로 뛰놀던 아이가 이곳에서는 발을 내딛을 때, 무언가를 잡으려 손을 뻗을 때 조심하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가 계속 주의를 주기도 했지만 아기도 직접 환경을 겪으면서 본능적으로 알게 된 듯했다.
딱히 자연물에도 관심을 갖지 않던 아기가 조금씩 바닥의 모래를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돌과 나뭇가지를 주워 놀고 있었다.
자연은 체험활동이 아니었다
매일 걸으며 우리는 틀린그림 찾기 하듯, 똑같은 풍경에서
작은 변화들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해가 나고 지며 시원한 그늘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 지, 고요한 연못에서 연꽃은 얼마나 활짝 피었다가 새침하게 져버리는 지, 새 둥지의 아기새들이 하나 둘 둥지를 떠나는 순간들까지.
'자연을 즐기자!'라며 무슨 대단한 액티비티라도 할 것처럼 도착한 촌스러운 도시가족은, 느리고 변화가 적은 풍경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경험했다.
집 앞 체리농장에 대해서, 아기새에 대해서 얘기하고
움직이지 않는 자연의 그림 안에서
천천이 걸어보며 새로운 즐거움을 경험했다.
자연을 즐겨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했던 우리.
제주도의 자연은 그저 걸으면 된다고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