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보상심리
남편의 육아휴직 = 나의 해방일!이라는 착각
남편과 동시에 육아휴직을 시작하면
나는 해방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지는 모른다.
다만,
"지난 1년 내가 했으니 이제 남편이 좀 더 해야지?"
라는 생각이 무의식 곳곳에 있었다.
분명 남편은 휴직 후 나보다 더 많이 도맡아 했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 기대와 욕심은 감사함보다 되려 억울함을 키웠다.
한참 새벽에 두세 번씩 아기가 잠에서 깨던 시기였다.
남편이 일주일에 4일, 내가 3일을 나눠 당번을 서기로 했다.
이때 정한 세 번이 나의 억울함 버튼을 강하게 눌렀다.
내 안 어딘가에 앞으로 아이 재우는 건 남편 몫이라 이미 결정해 둔 듯했다.
같이 결정한 건데, 내가 당번인 날에는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이 남모르게 미웠다.
식사를 마치면 남편이 부엌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아이를 돌봤다.
나는 계속 한 번씩 미어캣처럼 부엌을 들여다봤다.
남편은 이어폰을 한쪽에 꽂은 채로
잠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치우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핸드폰 보고 노는 거 아냐?'
못마땅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침 6시면 칼같이 기상하는 아기.
아침부터 굳이 다 같이 붙어 있을 필욘 없었지만
남편이 잠깐 눈 좀 붙이고 오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마음속 시한폭탄에 불을 붙여 두고
벽시계만 계속 곁눈질하게 되는 것이었다.
혼자 애 보는 게 힘든 게 아니라
내가 맘속으로 정한 시간 내에 안 나올까 봐 힘들었다.
화장실을 가는 남편의 뒤통수에도
미움의 눈초리를 계속 꽂았다.
내 안에 미움과 의심(화캉스를 보내고 있다는 의심인가?)이 계속 커졌다.
이쯤 되니
집안일 분담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만들이 짜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남편이 조금씩 더 분담하고 있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억울함과 서운함이 들던 나의 상태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남편과 대화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말한담.
노골적으로 적어보니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주 4일 새벽 당번을 주 5일로 전담해 줘?
나보다 더 자주 빨래를 개줘?
화장실에서 좀 더 빨리 나와줘?
이런 것들을 오빠가 먼저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말해줘?
내가 원하는 게 이런 거였나.. 헛웃음이 났다.
집안일을 더 맡아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바라던 건 남편의 '기꺼이'라는 태도였다.
"기꺼이 내가 더 할게!"
이 말과 행동 속에서 지난 나의 노고를 인정받고 싶었다.
결국 내 불만은 집안일을 더 넘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기대한 만큼 남편이 더 나서주지 않아서 생겼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아니, 정말 나서지 않더라도 표현이라도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더 어려운 문제였다.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표현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요구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남편도 휴직을 시작하며 적응하는 과정에서 힘들어하고 있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자발적인 기꺼이'를 원할 순 없었다.
이러한 내 안의 보상심리와 인정욕구를 깨닫고 나니
나의 마음이 얼마나 일그러진 모양으로 커지고 있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시작하면
육아와 집안일에서 해방이라는 착각을 했다.
지난 1년 육아휴직하며 바친 나의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남편이 직접 겪어보고 인정해 주길 바랐다.
'넌 쉬어! 내가 다할게!'
표현으로라도 좋으니, 이런 그림이 펼쳐지길 기대했던 거다.
그렇지만 남편의 노동은 요구할 수 있어도
마음까지 요구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